‘진짜 사장’ 나와라 뚝딱[점선면]
2026.06.19 07:00
느리고, 불충분하다
최근 반도체 초호황으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역대급 성과급 잔치를 벌였죠. 그런데 원청 대기업 소속 노동자 말고, 반도체 생산 과정에 노동을 제공한 수많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일까, 궁금했던 독자님 있으신가요?
노동시장의 원·하청 이중구조는 오래 묵은 우리 사회의 문제죠. 결국 같은 기업 또는 사용자를 위해 노동하지만 등용문에 따라 현저히 다른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현실.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은 이 문제를 보정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실제가 다른 듯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리해 봤습니다.
노란봉투법 시행 전부터 법의 취지가 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원청기업들이 ‘우리는 하청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시간을 끌 것이라는 예측이 그중 하나였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경기도가 사용자 지위를 회피하려 한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줍니다. 경기도는 도정을 펼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위·수탁기관과 계약을 맺는데, 이 기관들의 사용자로 인정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지침까지 만들었어요.
경기도 노동국은 지난 4월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상생협력 매뉴얼’을 제작해 도 산하기관에 배포합니다. 이 매뉴얼의 3분의1가량이 ‘사용자성’을 피하는 방법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지방자치단체가 노란봉투법을 얕은수로 피해가려 한 겁니다.
사안을 취재한 김태희 기자는 전국 광역단체 중 최초로 노동국을 신설하고 ‘노동존중’을 앞세워 온 경기도가 “노동자를 향한 명백한 기만”을 저질렀다고 꼬집었습니다. 노동 문제에서 솔선수범해야 할 공공부문이 사용자 지위에서 빠져나가려 했다는 점에서 특히 나쁜 사례입니다. 민간에도 ‘일단 사용자성은 부인하고 봐야 한다’는 인식을 더할 것이고요.
이런 ‘사용자성 회피’ 시도들은 노란봉투법 시행 전 경영계가 공포에 질렸던 것을 상기하면 참 낯선 풍경입니다. 경영계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수많은 하청업체들과 일일이 ‘무한교섭’을 해야 할 것이고, 그 결과 ‘경영마비’에 이를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렇지만 법 시행 100일이 지나도록 하청업체와 마주앉은 원청 사업장은 431곳 중 8곳에 불과합니다. 법 시행 첫날인 지난 3월 10일에도, 하청노조 407곳이 원청 221곳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응답한 곳은 5곳에 그쳤고요.
이쯤에서 그동안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원·하청 이중구조가 얼마나 많은 아픔과 불합리를 낳았는지 다시 돌아봅니다. 위험한 작업이 하청업체에 떠넘겨지는 ‘위험의 외주화’ 결과 구의역 김군과 김용균을 포함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기업이 어려울 때 외풍은 하청노동자부터 맞지만 훈풍은 원청에만 불고요.
누군가는 원·하청 간 취업 스펙 차이를 말하지만 이 게임에 노력만으로 뒤집기 어려운 ‘태생적 요인’이 작용한 지는 이미 오래됐습니다. 스펙 차이가 생애소득을 결정하고, 나아가 빈부를 대물리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목숨값도 다르게 매겨졌어요. 원·하청 이중구조가 노동문제를 넘어 사회문제인 이유이고, 노란봉투법이 필요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런 맥락에도 불구하고 경기도는 사용자성 회피 매뉴얼을 만들었고, 전국 243개 지방자치단체 중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한 곳은 3곳뿐인 현실이 씁쓸합니다. 공공부문마저 이렇게 나오니 노란봉투법 외면도 한동안은 이어질 듯합니다. 대신 개별 하청노조들이 원청의 사용자성 여부를 법정에서 일일이 다투며 지지부진하게 싸워 가겠지요.
느리고, 불충분합니다. 이제라도 정부가 원청교섭을 더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합니다. ‘반도체 잔칫상에 정규직 수저만 놓을 것이냐’는 질타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암을 얻은 협력업체 직원들의 목소리를 전해 드리면서 오늘 레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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