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전
지분 싸움에 묻힌 11조 승부수…美가 고려아연을 주목하는 이유
2026.06.19 06:47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의 경영권 분쟁이 3년 차 장기전에 접어들면서 시장의 관심은 지분율과 의결권 공방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산업계가 고려아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다르다.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고려아연은 단순한 비철금속 제련 기업을 넘어 전략광물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 이슈에 가려졌지만 고려아연은 세계 최대 비철금속 제련 기업 가운데 하나다. 아연·연·은 생산량에서 글로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미·중 갈등과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면서 시장에서는 고려아연의 가치 역시 단순 제련업체 관점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美 공급망의 빈칸, 고려아연이 들어갔다
최근 미국이 추진하는 공급망 정책의 핵심은 중국 의존도 축소다. 광물을 채굴하는 것만으로는 공급망 독립이 완성되지 않는다. 실제 병목은 정·제련 단계에서 발생한다. 중국은 희토류와 핵심광물 가공 분야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 기업의 정·제련 역량에 주목하는 배경이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발표한 배터리 공급망 안보 보고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보고서는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넘어 드론, 로봇, 무인잠수정 등에 활용되는 배터리를 대표적인 ‘이중용도(Dual-use)’ 기술로 규정했다. 공급망 경쟁이 산업 문제를 넘어 안보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미국 내 배터리 생산능력이 빠르게 확대되지만 핵심광물 정·제련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비중국권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 한국의 정·제련 역량이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고려아연이 미국 공급망 전략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다.
미국 정부는 올해 들어 핵심광물 공급망 구축 사업에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려아연은 비중국권 제련 역량을 갖춘 협력 기업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미국 행정부는 핵심광물 공급망 구축 사업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인허가와 행정 절차를 신속하게 지원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프로젝트 크루서블, 공장 아닌 공급망 투자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고려아연이 추진 중인 미국 프로젝트 크루서블이 주목받고 있다. 총투자 규모는 74억달러(약 11조원)에 달한다. 단순한 해외 공장 건설 사업이 아니다. 미국 내에서 광물 확보부터 정·제련, 소재 생산까지 이어지는 현지 밸류체인 구축이 목표다.
고려아연은 올해 미국 내 유일한 아연 제련소인 니어스타 USA(Nyrstar USA) 인수를 확정했다. 이를 기반으로 현지 사업 주체인 크루서블 징크(Crucible Zinc)를 출범시켰다. 가동이 중단됐던 테네시주 클락스빌 제련소 부지와 인근 광산 자산을 확보하면서 미국 내 생산거점 구축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인수의 의미를 단순 생산능력 확대보다 공급망 확보 측면에서 해석한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특정 금속의 수입선이 아니라 중국을 거치지 않는 독립적인 생산체계이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은 과거 기술력 한계로 처리하지 못했던 잔여 부산물(Pond Cake)에서 게르마늄, 갈륨, 안티모니 등 전략광물을 회수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완공 시 연간 110만 톤 규모의 원료 처리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 품목 가운데 11개가 미국 정부 지정 핵심광물에 해당한다. 프로젝트는 2027년 착공을 거쳐 2029년 아연·연 공정을 순차적으로 완공하고 2030년 1분기 전체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완성될 경우 북미 지역에서 전략광물 생산과 정·제련이 가능한 통합 거점이 구축되는 셈이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의 프로젝트 참여 배경을 공급망 안정성 확보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미국은 중국 등 특정 국가에 편중된 핵심광물 공급에 따른 위기를 우려하고 있다”며 “동맹국 중심의 신뢰도 높은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어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도 프로젝트 크루서블 발표 당시 ‘미국의 핵심광물 판도를 바꾸는 딜’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11조 투자지만 본사 부담은 7.8%
대규모 투자에 따른 재무 부담 우려도 존재한다. 다만 투자 구조를 들여다보면 시장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아연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투자비 74억달러 가운데 직접 지분 출자액은 5억8500만달러 수준이다. 전체 투자비의 약 7.8%에 해당한다. 나머지 자금은 미국 정부와 현지 전략적 투자자, 금융권 자금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조달된다.
고려아연은 올해 초 주주 서한을 통해 “재무적 부담은 미국 정부 및 투자자와 분담하면서도 프로젝트 운영과 기술 측면에서는 주도권을 유지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사업 리스크는 낮추고 운영 권한은 확보하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최근에는 GS에너지 해외투자전략실장 출신인 조정호 부사장을 프로젝트 크루서블 사업부 자금 담당 임원으로 영입했다. 미국 현지 금융 조달과 투자 집행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해외 투자와 금융 구조화 경험을 바탕으로 연방정부 정책 자금과 민간 투자 유치 업무를 맡을 예정이다.
경영권 분쟁 뒤 가려진 재평가 포인트
기존 사업의 수익성 역시 안정적인 편이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과 별개로 기술 경쟁력과 신사업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회수율 증대 등 기술개발(R&D)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기존 제련 경쟁력을 높여왔다”며 “핵심광물 수요 확대까지 맞물리면서 지난해 연간 기준 최대 실적을 기록한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경신했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6조720억원, 영업이익 746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58.4%, 영업이익은 175.2% 증가했다.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이다. 금·은 등 귀금속 가격 강세가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중국의 전략광물 수출 통제 강화에 따른 공급 우려도 우호적으로 작용했다.
시장에서는 고려아연의 기업가치를 단순 제련업체 관점에서만 평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확산하고 있다. 과거에는 금속 가격과 업황이 기업가치를 결정했다면 현재는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어서다.
경영권 분쟁이 단기 변수라면 미국 공급망 재편은 구조적 변수다. 시장이 고려아연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광래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고려아연은 아연·연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부터 인듐, 안티모니, 비스무스 등을 회수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핵심광물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될수록 비중국권 정·제련 역량을 확보한 기업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부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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