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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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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종전 협상 타결에 떠올린 얼굴들

2026.06.18 10:46

[김성호의 독서만세 318] 조해진 <빛과 멜로디>불과 몇 년 전이다. 반다르아바스에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다. 호르무즈 해협 가운데 위치한 이란의 핵심 항구 도시로, 싣고 간 자동차 수백 대를 부두에 내려주어야 했다. 통상의 항구에서 그러하듯, 선박에 올라온 이란 노동자들과 섞여 더듬더듬 대화했던 기억이 있다. 말 잘 안 통하는 이국의 노동자가 함께 섞여 일하다 쉴 때면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아는 얘기를 죄다 쏟아 놓고는 한다. 눈썹 진한 사내들이 박지성은 그렇다 쳐도 이영애, 곽태휘를 안다는 게 꽤 신기했다. 한 친구는 심지어 봉준호도 알았다. 나 또한 머릿속을 휘저어서 오마르 하이얌과 잘랄루딘 루미, 알리 카리미, 그리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름들을 꺼내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석 달 전부터 한동안 매일 아침 일어나면 구글 검색창에 'Bandar Abbas(반다르아바스)'라 쳐서 넣는 것이 일이었다. 미국이 이란을 선제 공격하며 매일 같이 이란 군사 시설에 미사일이 떨어지던 때였다. 말이 군사 시설이지 산업 시설, 발전 설비를 비롯해 애매한 곳들이 폭격을 맞고는 했다. 반다르아바스를 들어갈 때 해군 시설이며 군함들도 여럿 보았는데 이란 최대 항구이자 호르무즈 섬 바로 북쪽에 면한 곳이니 만큼 폭격을 피할 수는 없었을 터다. 어느 날 뜬 외신 뉴스에선 반다르아바스 주민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어 발전소 주변을 감쌌다는 기사도 나왔다. 그 즈음나는 이란 여자 초등학교에 폭탄이 떨어져 백 수십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읽고 말았다.

나는 이란을 생각하면 반다르아바스가 떠오르고, 반다르아바스를 생각하면 눈썹 진한 사내가 떠오르며, 눈썹 진한 사내를 생각하면 그가 꼬부랑 발음으로 이영애와 곽태휘를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분명히 들었을 이름조차 흐릿해졌지만 '에이 다다시'하는 부름에 '어이 형씨'하고 응답하던 기억 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를 떠올리면 이란이란 나라는 국제 뉴스 한 꼭지에 등장하는 일생 만날 일 없는 외국인들의 땅이 아니게 된다. 정보가 아니라 걱정이, 뉴스가 아니라 슬픔이 된다.

▲ 빛과 멜로디 책 표지
ⓒ 문학동네

한국 문학이 러우 전쟁을 담는 방식

<빛과 멜로디>는 조해진이 2024년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본래 '빛의 호위'란 이름의 단편이던 것을 확장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이뤄낼 수 있는 중요한 일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대표되는 세계사적 사건과 이어냈다. 공감과 연대, 다정함을 이야기하는 요즈음 한국 문학의 경향 가운데 등장한 소설이지만, 이례적으로 한국 내 소수자를 넘어 나라 바깥 문제에 다가섰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모두 4부로 나뉜 소설은 화자를 옮겨가며 각 인물의 사정을 전지적 시점에서 풀어낸다. 각 장은 연월일이 적힌 소제목 아래 들었는데, 2022년 11월 25일을 시작으로 마지막 글은 2024년 2월 21일에 끝을 맺는다. 초판이 출간된 게 2024년 8월이고 다뤄지는 주요한 내용도 러우 간 전쟁,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같은 동시대적 문제인 만큼, 독자가 다분히 실재하는 누구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가 있겠다.

승준은 이제 막 딸이 태어난 초보 아빠다. 마흔둘의 나이에 늦게 아이를 가진 그는 시사주간지 기자로 일하다 육아휴직을 내고 집에 있는 참이다. 대학교 선배의 제안으로 러시아 침공 뒤 일상이 무너진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인터뷰하는 작업을 맡은 승준이 문득 오랜 인연인 친구 은이를 떠올린다.

권은, 그녀는 한국에선 드문 직종인 분쟁 전문 사진작가다. 사진을 좋아해 무작정 찍다가 우연한 계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되었고, 또 우연에 우연이 따라 세계 곳곳 분쟁 지역을 오가며 일한 시절이 길었다. 승준과는 초등학교 동창 사이로, 딱히 친하진 않았으나 수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소설은 승준과 은 사이의 직접적 관계보다는 이들이 각각 마주한 삶의 과제들과 인연들을 따라가며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연결과 그 영향을 비춘다.

승준은 우크라이나 여성 나스차를 인터뷰한다. 우크라이나 동북부 도시 하르카우 외곽에 사는 그녀는 임신 중인 데다 러시아의 공습이 지속되는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다. 약사인 남편은 아직 제게 약을 사러 오는 주민들이 많아 도시를 떠날 수가 없다고 한다.

소설은 나스차가 마주한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목표 타격 지점을 알 수 없는 폭격이 간헐적으로 지속되는 그 곳의 풍경을 담는다. 나스차가 사는 공동주택에 아직 피난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노인 옥사나는 1934년 생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레닌그라드라 불렸던 그 도시의 1930년대 태어난 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역사를 아는 이라면 짐작할 테다.

빛, 그리고 멜로디의 공통점

권은은 일터에서 왼쪽 다리 반절을 잃었다. 그저 잃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시리아에선 난민이던 살마란 여자아이를 알게 되었고, 그녀는 은을 마치 또 하나의 엄마처럼 따른다. 은이 사진가가 된 건 게리 앤더슨이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영향인데, 그녀는 생전 게리를 만나보진 못했으나 그 여동생 애나와는 인연이 닿아 돈독한 사이가 된다. 애나를 통해 게리의 아버지 콜린을 알게 되고 그 살아 생전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영국인 콜린은 물론 2차 대전에 종군 하였는데, 무려 폭격기 조종사로 독일 드레스덴 등지에 출격한 이력이 있다고 했다.

소설은 좀처럼 만날 일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어질 수 없을 듯 보이던 이들 사이를 건너며 그들 간의 이어짐과 그 이어짐이 바꿔내는 것이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무너졌을 이가 버텨내고, 가라앉을 이가 일어서며, 멈추어 설 이가 나아간다. 그 모두가 다른 이로부터 비롯되니, 연결은 인간의 생리이고 인간이란 고립되어선 안 되는 존재가 아니냐는 물음이 다정하게 일어난다.

소설의 제목이 <빛과 멜로디>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다. 빛은 관찰하지 않을 땐 파동으로 흐른다고 하지 않던가. 멜로디 또한 소리, 그러니까 파동으로써 퍼져나간다. 빛과 멜로디 모두 흐름이며, 흐름이란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지고 닿아가는 일인 것이다. 말하자면 홀로 멈춰 있지 않다. 닿아서 바꿔낸다. 빛도, 멜로디도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 저기를 여기만큼 좋게 하는 것들이다. <빛과 멜로디>는 그래서 퍼져나가야 아름답다.

전쟁이 터지기 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러니까 소설 속 옥사나의 고향에 간 일이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묻혀 있는 이 도시에서 그 무덤 위에 그가 좋아했을 아르마냑 한 병을 올려두고서, 서울에서 챙겨간 <토지> 여섯 권을 챙겨 이제 막 푸틴의 모교 안에 섰다는 박경리 동상을 찾아 갔던 때가 있었다. 그 몇 년 전에는 소설 속 콜린 같은 조종사에게 무차별적인 소이탄 폭격을 맞았던 독일 도시를 찾아 불타버린 채 보존된 성당을 가만히 올려다 본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에 고통 받았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오래도록 읽어 내린 날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란과 미국의 휴전 소식을 검색하며 나는 반다르아바스, 내가 항해하던 호르무즈 해협의 아름다운 도시, 환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 모두가 각각의 존재로 고립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은근하고 반듯하게 이어져 있는 것이다, 빛과 멜로디처럼.

이란과 미국의 종전 협상 타결을 반기며.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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