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71] 세기의 재판, 파멸의 악연
2026.06.17 23:40
1994년 6월 18일 밤 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의 한 저택 앞에 서 있다. 이곳에서 지난 12일 밤, 미식축구 선수 출신 배우 O. J. 심슨의 전 부인 니콜 브라운 심슨과 그녀의 친구(심슨이 니콜의 애인이라고 생각해 질투하는) 론 골드먼이 잔인하게 살해됐다. 심슨의 혈흔 묻은 장갑과 발자국 등이 발견되자 심슨은 즉각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는데,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사람들을 더 모여들게 하는 일들이 어제 17일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심슨이 친구의 차를 타고 고속도로에서 경찰차들에게 추격당하는 도주극을 펼친 것이다. 과연 영화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배우답다. TV로 생중계된 이 광경은 미국 내에서만 1억명 가까이가 동시 시청한다.
허나 이것조차도 그의 ‘법정 범죄 드라마(?)’에 비한다면 도파민이 적었다. 이 살인사건은 ‘당시로서는’ 심증은 상당하되 물증이 아쉬운 케이스의 전형이었다. DNA가 과학 수사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특히 일반인들에게까지 신뢰를 주게 된 건 1998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미합중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정액 판정 이후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슨은 형사재판에서는 이겼지만, 유족들이 제기한 민사재판에서는 패소해 3350만달러 배상 판결을 받아 죽는 그날까지 수입을 압류당한다. 아메리칸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던 이 대스타는, 그가 죽였든 안 죽였든 간에, 전 부인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인간과 인생이 동시에 빠그라져버렸다.
2007년, 심슨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 자신의 기념품을 되찾겠다며 무장 강도를 벌인 혐의로 체포돼 최대 33년형을 선고받았고, 9년 복역 뒤 2017년 가석방된다. ‘O. J. 심슨 살인 재판 사건’은 미국의 인종 갈등, 미디어의 자극적 보도, 현대 사법 체계의 헛점, ‘악마의 변호사’, 대중 여론과 국민 참여 재판의 문제점 등 세기의 논란거리들을 남겼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 ‘악연(惡緣)’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삶에서 이것보다 무서운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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