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는 농경사회의 병” 통념 깼다…5500년 전 수렵·채집사회 덮쳐
2026.06.18 00:15
약 5500년 전 시베리아 바이칼호 인근 앙가라강 유역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한 무덤에는 어린 여자아이 셋이 나란히 묻혔고, 다른 묘지에서도 형제자매와 사촌 등 가까운 친족들의 죽음이 이어졌다.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 감춰져 있던 사인(死因)은 고대 DNA 분석으로 이번에 드러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 가운데 하나인 페스트였다.
덴마크 코펜하겐대 룬드베크재단 지오제네틱스센터와 영국 옥스퍼드대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은 앙가라강 주변의 후기 신석기 시대 매장지에서 출토된 유골 46구를 분석한 결과를 17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유골의 치아에서 고대 DNA를 추출해 병원체의 흔적을 찾은 결과, 46구 가운데 18구(39%)에서 페스트균 DNA가 나왔다. 14세기 런던 흑사병 매장지의 검출률에 맞먹는 수치로, 당시 감염이 산발적 사례가 아니라 집단 유행이었음을 보여준다.
◇가족을 따라 번진 페스트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높은 감염률만이 아니었다. 유골의 유전체를 비교해 친족 관계를 재구성하자, 페스트가 형제자매와 사촌, 이모·고모와 조카 등 가족 집단을 따라 퍼진 흔적이 나타났다.
브라츠키카멘 유적의 한 무덤에서는 4~9세 여자아이 세 명이 함께 발견됐다. 이 가운데 두 명은 사촌으로 추정됐고, 나머지 한 명도 가까운 모계 친족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세 아이 모두에게서 페스트균 DNA가 검출됐다.
12~15세 자녀와 35~50세 아버지가 같은 유행기에 숨진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있었다. 다만 연구팀은 페스트 감염이 한순간에 공동체 전체를 휩쓴 것이 아니라, 가족 사이를 옮겨 다니며 일정 기간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희생자 65~75%가 15세 미만
페스트 감염자가 다수 확인된 유적의 묘지에서는 어린이 사망이 유난히 많았다. 65~75%가 15세 미만이었고, 특히 7~11세에 사망자가 집중됐다. 같은 바이칼호 주변 청동기 시대 묘지에서 어린이 비율이 26~33%였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페스트균에는 후대 페스트균에서 사라진 특이한 유전자(ypm)가 남아 있었다. 이 유전자는 면역세포를 광범위하게 자극해 염증 반응을 증폭시키는 단백질을 만든다. 연구팀은 강한 염증 반응이 당시 어린이의 중증도와 사망 위험을 높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직접적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번 균주를 토대로 페스트균의 출현 시점을 적어도 약 5700년 전 이전으로 추정했다. 이는 기존의 분석보다 수백 년 이상 앞선 시점이다.
◇농경 사회 이전에도 치명적 유행
이번 연구는 페스트가 대규모 농경 사회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는 기존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이칼호 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개 이외의 가축도 기르지 않았다. 물고기와 야생동물을 사냥한 소규모 수렵·채집인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페스트는 가족과 친족 집단을 따라 번지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연구팀은 바이칼호 일대에 서식하는 마멋을 유력한 감염원 후보로 제시했다. 마멋은 땅다람쥐와 비슷한 설치류로, 오늘날에도 이 지역 페스트균의 주요 자연 숙주다. 페스트에 감염된 마멋을 손질하거나 먹는 과정에서 균이 사람에게 넘어온 뒤, 비말을 통해 사람 사이에 퍼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다만 이번 유적에서 직접적인 동물 숙주는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감염 경로는 단정할 수 없다.
연구팀은 “인구밀도가 낮고 농경을 하지 않았던 선사시대 수렵·채집 공동체에서도 페스트가 사람 사이에 퍼져 치명적인 유행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을 이번 연구가 밝혀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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