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적은 누구냐” 선거 때면 되살아나는 편가르기…청년 극우의 놀이가 된 ‘주적 챌린지’
2026.06.17 06:04
“기득권에 대한 강한 분노”…정치인이 이를 부추기는 건 무책임
지난 5월 말 고려대학교 축젯날이었다. 홍희진 진보당 성북구청장 후보(진보당 공동대표)는 안암역을 찾았다. 축제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러 가는 학생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다. 2번 출구인지 3번 출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인도가 좁아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혼자 최대한 도로 쪽에 붙어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함께 선거운동을 하던 이는 건너편에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성 셋이 지나가면서 여러 번 돌아봤다. ‘어, 왜 그러지?’라고 생각할 때 ‘야, 물어봐. 물어봐’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성들이 홍희진 후보 쪽으로 돌아섰다. 2명이 앞으로 다가왔다. 홍 후보 오른쪽에는 변압기처럼 생긴 설비가 있었고, 왼쪽에는 자전거 거치대가 있어서 갑자기 갇힌 모양새가 됐다. 남은 1명은 옆에서 카메라 조명을 켜고 촬영을 시작했다.
남성들이 물었다. “아,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젊은 남성들이 자당 후보들에게 ‘주적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다닌다는 걸 들었던 터라 “알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럼 물어볼게요. 대한민국의 주적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남성들이 웃으며 물어봤다. 홍 후보가 “그만해라. 이건 선거운동을 방해하는 거다”라고 답하자 남성들은 “아, 지금 대답을 피하는 거냐”라고 되물었다. 홍 후보가 “제가 인사하는 걸 이렇게 방해하면 안 됩니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그냥 가세요”라고 재차 말하자 이들은 “아, 네 뭐 알겠습니다”라고 돌아섰다. 뒤쪽에서 기다리던 일행이 “야 뭐래?” 하면서 ‘성과’를 궁금해했다.
지난 6월 9일 주간경향과 만난 홍 대표는 “내심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부닥치니 나를 보호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분들이 간 다음에도 한동안 인사를 못 하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고 이런 게 편한 상황은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적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거,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면 얼마든지 대화할 의향이 있지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사실 아니잖아요. 저를 비롯한 특정 정당의 후보를 조롱하거나 일종의 낙인찍기를 하기 위해서 물어보는 거잖아요. 본인들이 하는 행동이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엄연히 선거운동을 방해하는 행위이고,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후보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주적 챌린지’가 유행했다. 홍 대표에게 하듯 유세 중인 후보를 찾아가 “대한민국의 주적은 누구입니까?”라며 기습 질문을 하는 것이다. 민주당을 포함한 진보진영 후보들이 주된 상대였다. 일부 유튜버들은 후보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찍어 ‘참교육’을 했다는 영상을 올렸다.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북구갑에 출마한 여당의 하정우 후보도, 박찬대 인천시장 후보도 이런 공격을 당했다.
‘주적이 누구냐’라는 물음에 ‘북한’ 혹은 ‘중국’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면 통과, 그렇지 않으면 온라인상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형국이다. 질문을 한 사람은 영웅이 되고 답변을 회피한 사람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소비되고 있다.
박태훈 진보당 조직위원장은 최근 올린 페이스북 글에서 “서대문·관악·성북에 출마한 진보당 청년 후보들도 같은 질문을 각자 다섯 번 넘게 받았다”면서 “어떤 답을 내놓든 그 답을 빌미로 ‘너는 국민이 아니’라고, ‘처단해야 할 대상’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마련된 절차다. 사상검증이라는 외피를 쓰고 적을 식별하기 위해 벌이는 의식이다”라고 지적했다.
권태호 한겨레신문 기자는 최근 칼럼에서 “마치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하기 위해 ‘주고엔(15엔)이라고 말해보라’고 협박하는 상황이 연상된다”고 했다. 비슷하게 최근 한 스레드(thread) 이용자는 “중국인 구별하는 방법!!!!!!!! 을지로입구역 시켜보기”라는 게시물을 올린 후 “(중국인이) 집회에 와서 분탕 치려고 할 수 있어서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라고 이유를 들었다. 재선거 요구 집회에 결합해 부정선거론을 퍼트리는 윤 어게인 세력도 ‘주적은 누구냐’는 질문으로 참가자를 검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과 중국은 싫든 좋든 적대하기보다 공존과 협력을 모색해야 할 상대다. 전쟁과 대립이 불러올 피해는 자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마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앞에서는 유화적이다. 접경지대에서 벌인 북한과의 ‘확성기 대결’은 인근 주민에게 큰 고통을 줬다. 주요 공직자가 주적을 공언하는 것 자체가 국익에 득이 되지 않는 행위다. 국방백서에서도 2000년 이후 사라진 표현이다. 그런데도 주적론은 선거 때마다 되살아나 선거판을 기웃거렸다.
2017년 19대 대선 TV토론에서 당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북한이 주적이냐’고 물었다. 당시 문 후보는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답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주적은 북한’이라는 단문 구호를 올렸다. 이재명 정부 들어서도 통일·국방·국가보훈·고용노동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당시 권오을 국가보훈부장관 후보자는 “평화체제로 나가야 할 시점에 20~30년 전 용어를 다시 쓸 필요가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주적 챌린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언젠가는 그 질문을 국가 권력이 묻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해 처벌하려는 욕구가 낳은 극단적인 결과를 우리는 이미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로 경험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등 극우 보수를 용인, 지지, 동조하는 듯한 주류 정치인의 행태가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이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고 말한 바와 같다.
홍희진 대표는 “대중 정치인의 행동이 시민들에게 ‘아, 저런 거 해도 되는구나, 우리 사회는 이런 걸 해도 용인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일종의 신호가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험하고 해롭다”면서 “그렇게 본인이 던진 그 작은 파장이 돌고 돌아서 자신을 향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극우 집단이 청소년에게 접근하기 위해 주적 챌린지를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치인이 이를 부추기는 건 정말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밝혔다.
냉전을 경험하지 않은 청년 세대가 북한과 중국을 주적으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적, 멸공이라는 단어 밑에 깔린 박탈감과 기성세대·기득권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동춘 성공회대 명예교수는 “지금 청년 세대의 ‘주적’ 담론은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불안감과 적대감의 표현이자 분노를 표출할 희생양 찾기의 결과로 볼 수 있다”면서 “양당 체제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청년이 개인으로만 존재하고 공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도록 한 기성 정치가 만든 결과”라고 진단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의 주적 놀이는 2030 청년 남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청년 세대가 말하는 공정성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성취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보상이 배분돼야 한다는) 능력주의를 뜻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자신에게는 공평하지 않고 역차별에 해당한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피해의식은 근거가 있다. 부모 세대는 정치적으로 군부독재, 권위주의 시대를 겪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할 수 있고, 언젠가는 가정을 꾸리고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전체적으로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민주화라는 큰 명제 아래 노동자와 빈민, 사회적 약자가 힘을 합하는 공동의 전선이 있었다. 그래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연대, 도농의 연합이 가능했다.
지금은 성장이 정체된 상태이고, 취업은 어렵고, 자산 형성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인 상태에서 성평등 정책과 비정규직의 차별 해소와 같은 진보정당의 정책은 오히려 청년 남성들에게는 공정하지 않은 조치로 여겨졌다.
윤인진 교수는 “핵심 이슈에서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그 정당의 모든 걸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냉전을 경험하지 않았는데 멸공이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이건 하나의 레토릭일 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책을 펴는 상대를 조롱하는 정치 행위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타인을 향한 폭력과 혐오, 세상에 대한 어긋난 불만을 그대로 둔다면 개인의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분열된 사회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주적 챌린지를 우려하는 이들은 청년의 삶을 돌보고, 기회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윤 교수는 “청년 세대가 갖는 분노와 좌절감, 여기서 비롯해 상대를 조롱하는 극우적 행태는 결국 집단적 경험이고, 그들이 처한 공통의 여건에서 생성된 것”이라면서 “이들이 정치적으로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따질 게 아니라 청년 세대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해결할 실질적 방안을 모색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공지능으로 일자리가 위협받는 시대라는 점에서 과거 대공황 시기 미국의 뉴딜 정책과 같은 적극적인 일자리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다. 윤 교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예로 들면 과거처럼 어느 일방이 피해를 보는 구도가 아니기 때문에 획일적인 정규직화보다 동일 노동을 하면 임금과 작업 환경을 동일하게 하는 덜 갈등적인 관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혐오 발언의 확산을 막을 제도도 필요하다. 홍 대표는 “온라인 커뮤니티 혹은 플랫폼을 통해서 혐오 정치가 여과 없이 유통되고, 확증되는 상황을 제도적으로 막아야 한다”면서 “나치 역사를 경험한 독일의 경우 인종 차별이나 인종 혐오적 표현을 플랫폼 사업자가 제때 걸러내지 않으면 책임을 묻는다. 우리도 온라인 공간에서 과도한 낙인찍기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퍼지지 않도록 플랫폼 사업자에게 일정 정도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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