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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원화…고환율 미스터리

2026.06.16 21:01

반도체 떼돈 벌어도…


# 서울의 한 식품 업체 구매팀은 요즘 환율 화면을 원재료 시세표보다 먼저 본다. 식품 제조업은 주요 원재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서다. 밀가루, 원당, 커피, 대두유 가격이 그대로여도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원화 기준 매입 단가는 뜀박질한다. 식품 업계 관계자는 “발주할 때는 달러 기준으로 계산하고 팔 때는 원화 납품가로 팔다 보니 환율이 10원, 20원만 움직여도 품목별 손익이 달라진다”며 “대형마트·편의점 납품가는 분기나 반기 단위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 환율 상승분을 바로 반영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올 6월 들어 원·달러 환율 평균이 1520원을 넘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8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장중 고가는 1560원을 뚫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이후 가장 높다. 반도체 초호황으로 우리 기업이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이지만, 원화 가치가 유독 약세를 보이자 시장과 산업계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구조적 원인 변화에 따른 원화 약세로 보고 고환율 장기화에 대비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6월 들어 원·달러 평균 환율이 1520원대로 올라섰다.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6월 들어 지난 5일까지 주간거래 종가 기준 원·달러 평균 환율은 1522.4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1998년 2월 1626.8원 이후 28년 4개월 만에 가장 높다. 지난 6월 5일 야간거래에서는 장중 1561.5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 6일 장중 고가 1597원 이후 17년 3개월 만의 최고치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5월 15일 이후 3주째 1500원 위에 머물며 고점을 끌어올렸다.

이번 고환율을 단기 급등으로 치부하기에는 추세가 예사롭지 않다. 올 2분기 들어 지난 6월 5일까지 평균 환율도 1491원으로 1998년 1분기(1596.88원) 이후 가장 높다. 연초 이후 평균 환율 역시 1477.2원으로 역대 가장 높았던 지난해 평균 1421원을 훌쩍 웃돈다.

무엇보다 최근 원화 약세는 달러 강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6월 5일 종가 기준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전쟁 발발 직전인 지난 2월 27일보다 6.9%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42개국 통화 가운데 이집트 파운드,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이어 세 번째로 낙폭이 컸다. 중동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엔화 하락률이 2.6%에 그친 것과 비교해도 원화 낙폭은 훨씬 크다. 필리핀 페소, 태국 바트, 말레이시아 링깃, 베트남 동 등 한국인이 자주 찾는 동남아 주요 통화보다도 원화 가치는 더 많이 떨어졌다. 통화 불안이 만성화된 튀르키예 리라와 아르헨티나 페소보다도 낙폭이 컸다.

대외수지 지표만 놓고 보면 환율이 이렇게 고공행진을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4월 경상수지는 282억9000만달러 흑자로 집계됐다. 월간 기준 지난 3월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흑자다. 흑자 행진도 2023년 5월 이후 36개월째다. 경상수지만 보면 원화 강세 압력이 생기는 게 정상이지만 외환 시장 현실은 정반대다.

코스피와 원화의 전통적 동조화도 깨졌다. 과거에는 반도체 업황이 살아나고 외국인 자금이 국내 증시로 유입되면 코스피 상승과 원화 강세가 함께 나타날 때가 많았다. 최근 흐름은 정반대다. 메모리 호황을 타고 코스피와 반도체 대형주는 급등했지만, 원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주식 매도에 따른 달러 환전 수요는 단기적으로 환율을 밀어 올릴 수 있지만, 고환율 고착화를 설명하는 핵심 변수로 보기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코스피-원화, 디커플링

달러 국내 환류 흐름 약화

실물경제 지표와 환율 흐름이 괴리를 보이는 배경을 두고 몇 가지 원인이 지목된다.

첫째, 수출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다시 국내 설비투자 등으로 환류되는 흐름이 약화한 결과로 분석된다. 관세 전쟁과 중국발 공급 과잉(대외 요인), 규제를 비롯한 역(逆)인센티브 구조(국내 요인)가 맞물려 우리 기업 상당수는 해외로 생산기지를 줄줄이 옮기는 중이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글로벌 대기업은 미국·유럽에서 대규모 설비투자, 인수합병, 연구개발 투자를 벌이면서 수출로 번 달러를 한국으로 들여오지 않고 현지에 재투자한다. 수출 기업 환전 감소는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핵심 이유다.

둘째, 외국인 투자자의 환헤지 확대도 원화 강세 경로를 차단한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투자은행(IB) JP모건은 최근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베팅하면서도 원화 약세 위험은 선물환·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등으로 적극 헤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달리 말해,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반도체 주가 상승에 베팅하지만, 원화 가치 상승까지 믿지는 않는단 의미다.

최근에는 한국 주식을 사거나 보유하더라도 선물환·NDF 같은 파생상품으로 환율 위험을 따로 막는다. 예컨대, 한국 반도체 주식이 오르면 주가 차익은 가져가되, 원화가 약세로 가 달러 환산 수익이 훼손되는 위험은 미리 헤지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외국인 자금이 증시에 들어와도 현물환 시장에서 원화 매수 압력은 약해지고, 헤지 과정에서 오히려 ‘달러 매수·원화 매도’ 수요가 생길 수 있다. 코스피가 급등하고 경상수지가 흑자를 내도 원화 약세가 두드러진 배경이다.

셋째, 국내 시장 복귀계좌(RIA) 도입에도 불구하고 해외 투자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증권사들은 지난 3월 해외주식 매도 자금을 국내 장기투자로 연결할 경우 한시적 세제 혜택을 주는 RIA를 내놨다. 국내 증시 부양책에도 개인 자금이 미국 주식과 ETF로 향하는 흐름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산업계 손익계산서도 복잡해졌다.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 호재라는 인식도 약해졌다는 평가다. 수출선이 다변화되면서 현지 통화 매출 비중이 커졌고, 주요 수출 대기업은 미국·유럽 현지 공장 증설 과정에서 달러 부채를 잔뜩 늘렸다. 환율 상승은 장부상 영업이익에는 환산이익으로 일부 반영될 수 있지만, 외화부채 평가손실과 금융비용은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특히, 식품·항공·석유화학·철강 등은 원가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져 고환율 직격탄을 맞는다.

원자재 상당 부분을 달러로 결제하고 중간재 수입 비중이 높은 한국 경제 특성상 고환율 우려를 비껴갈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단기간 원화 약세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직된 노동 시장과 반도체 쏠림 등 구조적 개혁 없이는 원화 수요를 크게 늘리기는 힘들다”고 했다.

다만, 수출 호조세가 이어지고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될 경우 환율 상승 압력이 완화할 수 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반도체 중심 수출 호조로 달러 공급이 늘고 금리 인상으로 한미 간 금리 격차가 좁혀지면 환율이 다소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64호(2026.06.17~06.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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