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의 심리렌즈] '디스클로저 데이' 마거릿은 왜 불안할 때마다 아빠 얘기를 할까?
2026.06.16 14:01
영화 '디스클로저 데이' 속 마거릿 페어차일드(에밀리 블런트)는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캔자스시티 방송국의 기상캐스터인 그는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자기 몫을 해내고, 음악을 만끽하며 출근한다. 이미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지만 아나운서 면접을 준비하고, 익숙해진 동네에는 싫증을 느껴 이사를 고민한다.
언뜻 보면 추진력 있는 사람이다. 멈춰 있기를 거부하고, 더 넓은 무대와 새로운 자극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
하지만 영화는 이 생기를 곧 다른 빛 아래에 세운다. 마거릿은 진취적인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할 뿐이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있다. 어린 시절 마거릿은 아버지의 몸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딸이었다.
마거릿이 불안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병을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현재의 증상을 현재의 증상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몸에서 작은 이상 신호가 나타나는 순간, 마음은 과거의 병실로 달려간다. 지금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이상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시작이라는 확신…
처음 의식을 잃고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마거릿은 자신에게도 파킨슨병이 시작된 게 아닌지 의심한다. 기차 추격 신에서도 같은 공포가 되살아난다. 추격자를 따돌린 뒤 화물칸에 숨어든 마거릿은 떨리는 손을 바라보다 과호흡에 빠진다. 그는 그 떨림을 긴장 반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앗아간 병의 징후가 자신에게도 나타난 것처럼 느낀다.
공황장애 인지모델을 제시한 데이비드 클라크(David M. Clark)는 공황발작이 특정 신체 감각을 실제보다 위험한 신호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증폭될 수 있다고 봤다. 숨 가쁨, 두근거림, 어지러움, 손 떨림 같은 정상적 불안 반응이 "곧 죽을 것 같다",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 "통제력을 잃을 것 같다"는 식으로 번역될 때 불안은 다시 신체 증상을 키우고, 그 증상은 다시 공포를 강화한다. 마거릿 역시 손 떨림을 긴장 반응이 아니라 파킨슨병의 전조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불안은 공황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솟는다.
마거릿에게 손 떨림은 현재의 생리 반응이 아니라 과거의 이미지다.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몸, 아버지가 점점 자기 몸을 잃어가던 시간. 그래서 그의 마음은 몸의 작은 신호 앞에서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상실로 돌아간다.
트라우마는 거대한 사건 속 장면으로만 돌아오지 않는다. 냄새, 소리, 빛, 심장 박동, 호흡, 근육의 떨림처럼 사소한 감각이 과거를 현재로 끌고 올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수용 감각(Interoception)에 대한 조건화로 설명하는데,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 내수용 감각과 연결돼 동일한 신체가 감지될 때 '불안'이나 '공포'라는 조건화된 반응이 자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수용 감각은 심장 박동, 호흡, 허기, 근육 긴장도 등 신체 내부 장기의 상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흔히 '여섯 번째 감각'으로 불리며 스트레스 관리, 감정 조절 및 직관적 의사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마거릿의 행동 패턴을 이 렌즈로 다시 보자. 그는 동네에 금세 싫증을 내고, 잘하고 있는 일 너머의 무대를 꿈꾸고, 음악에 취해 속도를 낸다. 표면적으로는 자극추구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난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확인 욕구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아버지의 병이 그에게 남긴 공포는 죽음만이 아니었다. 몸이 굳어가고, 삶이 좁아지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통제권을 잃는 상황이다.
그래서 마거릿은 계속 움직인다. 새 동네, 새 기회, 새 역할, 새 속도. 자신의 생동감을 통해 불안을 밀어낸다. 가만히 있으면 몸의 신호가 들린다. 몸의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의 병이 떠오른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고, 다음을 상상하고, 더 큰 무대를 향해 간다.
이런 반응은 경험회피(Experiential Avoidance)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고통스러운 감정, 기억, 신체 감각을 느끼지 않기 위해 행동을 바깥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겉으로는 적극성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움직임이 자기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불안을 못 듣게 하려는 소음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거릿의 능력마저 몸을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홍관조와 마주한 뒤 그는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말하고, 타인의 내면을 읽는 능력이 생기고, 생방송 중 자신도 모르게 방언을 내뱉는다. 말하지 않으려 해도 말이 나오고, 알지 못하던 언어가 흘러나오고, 타인의 정보가 자신의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아버지는 병 때문에 몸의 주도권을 잃었다. 마거릿은 외계 신호 때문에 몸이 낯선 메시지의 통로가 된다. 두 사건은 달라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같은 공포를 건드린다.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마거릿의 능력은 축복인 동시에 트라우마의 재연이다. 특별한 힘을 얻어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힘이 가장 두려운 방식으로 찾아와서 무너지고 만다.
마거릿에게 몸은 안전한 집이 아니라, 언제든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장소다. 영화는 그 몸을 통해 마거릿을 세계와 연결시킨다. 그는 날씨를 전하던 사람이다. 바람, 구름, 폭풍, 기압의 변화를 읽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직업을 가졌다. 외계 신호 이후 그는 날씨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과 세계의 비밀을 읽는다. 기상캐스터였던 그는 인간과 외계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자가 된다. 하늘의 변화를 전하던 사람이, 이제는 인간 안쪽의 기압을 읽는다.
다니엘이 기차 안에서 마거릿을 진정시키고, 몸을 통제할 수 있게끔 돕는 방식은 상징적이다. 그는 마거릿에게 "괜찮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게 하고, 옆에 있던 현악기의 감촉에 집중하게 한다. 생각을 설득하는 대신 몸을 현재로 데려온다. 숨, 손, 촉감, 눈앞의 사물. 과거의 장면으로 끌려간 몸을 현재의 객차 안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트라우마 치료에 이용되는 그라운딩(Grounding)이다. 과거의 기억에 압도되거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마음을, 오감과 신체 감각을 활용해 현재로 안전하게 되돌려놓는 심리 안정화 기법이다.
마거릿의 여정은 외계의 비밀을 밝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기 몸을 다시 해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반의 그는 몸의 변화를 병의 전조로 본다. 손이 떨리면 아버지를 떠올리고, 숨이 가빠지면 자신도 무너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기에 이른다. 능력 발현 초기의 그는 몸에 휘둘린다. 알지 못하는 언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의식이 흐려진 상태에서 타인의 결핍과 문제를 건드린다. 이때의 마거릿에겐 능력이 선물이 아닌 침범이다. 아버지의 병을 통해 각인된 공포가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후반부의 마거릿은 달라진다. 그는 사람들의 결핍을 읽고,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말을 건넨다. 그들이 보지 못하던 감정, 말하지 못하던 욕구, 오래 붙잡고 있던 오해를 드러낸다. 관계의 막힌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잃은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에게 아내의 미소를 보여주는 장면은 울림을 남긴다. 마거릿은 노아의 상실을 없애주진 않는다. 죽은 사람을 되돌려주지도 않는다. 대신 상실에 짓눌린 기억 속에서 따뜻한 장면을 건져 올린다. 노아가 고통 때문에 잃어버렸던 얼굴, 슬픔 때문에 흐려졌던 행복을 다시 돌려준다.
마거릿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없애지 못하고, 갈등 자체를 마법처럼 지우지도 못한다. 대신 각자가 잃어버린 장면, 외면한 감정, 말하지 못한 진심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능력은 외계적 힘이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힘이다. 타인의 고통을 삭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능력이다.
마거릿의 여정은 몸에 대한 공포에서 몸을 통한 연결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초반의 몸은 병의 전조를 알리는 위험한 장소였고, 중반의 몸은 낯선 신호에 점령당한 통로였다. 후반의 몸은 타인의 상처를 감지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아버지의 병이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상처는 더 이상 마거릿을 무너뜨리기만 하는 기억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몸을 통해, 다른 사람의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된다.
영화가 끝내 마거릿의 입에 남겨둔 말은 "Listen"이다. 거창한 계시도, 친절한 해설도 아니다. 들으라는 말 하나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몸의 소리를 공포로만 들었다. 손 떨림은 병의 시작으로, 과호흡은 몰락의 예고로, 몸의 낯섦은 아버지의 운명으로.
하지만 마거릿이 배워야 했던 듣기는 달랐다. 몸을 파국의 증거로만 듣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곧장 재난으로 번역하지 않는 것.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신호를 공포가 아니라 연결의 가능성으로 다시 들어보는 것.
초반의 마거릿은 이 듣기에 서툰 사람이었다. 남자친구가 이사를 꺼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병원에서 깨어난 뒤 갑자기 도망치는 이유조차 연인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속도와 불안을 보지 못한 채, 자기 목표와 자기 공포만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 그가 후반에는 사람들의 결핍을 읽고,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 설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침묵도, 슬픔에 잠긴 사람의 표정도, 관계 안에서 어긋나는 신호도 놓친다.
마거릿은 자기 몸의 배신자가 아니라 자기 몸의 해석자가 되면서 비로소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몸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떨리는 몸을 붙잡고도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세계와 연결되는 사람은 불안을 완전히 지워낸 사람이 아니라, 불안이 밀려와도 끝내 자기 안에 머물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아주경제=이동건 기자 ldg920210@ajunews.com
언뜻 보면 추진력 있는 사람이다. 멈춰 있기를 거부하고, 더 넓은 무대와 새로운 자극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
하지만 영화는 이 생기를 곧 다른 빛 아래에 세운다. 마거릿은 진취적인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할 뿐이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있다. 어린 시절 마거릿은 아버지의 몸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딸이었다.
마거릿이 불안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병을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현재의 증상을 현재의 증상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몸에서 작은 이상 신호가 나타나는 순간, 마음은 과거의 병실로 달려간다. 지금 내 몸에서 벌어지는 이상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시작이라는 확신…
처음 의식을 잃고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마거릿은 자신에게도 파킨슨병이 시작된 게 아닌지 의심한다. 기차 추격 신에서도 같은 공포가 되살아난다. 추격자를 따돌린 뒤 화물칸에 숨어든 마거릿은 떨리는 손을 바라보다 과호흡에 빠진다. 그는 그 떨림을 긴장 반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앗아간 병의 징후가 자신에게도 나타난 것처럼 느낀다.
공황장애 인지모델을 제시한 데이비드 클라크(David M. Clark)는 공황발작이 특정 신체 감각을 실제보다 위험한 신호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증폭될 수 있다고 봤다. 숨 가쁨, 두근거림, 어지러움, 손 떨림 같은 정상적 불안 반응이 "곧 죽을 것 같다",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 "통제력을 잃을 것 같다"는 식으로 번역될 때 불안은 다시 신체 증상을 키우고, 그 증상은 다시 공포를 강화한다. 마거릿 역시 손 떨림을 긴장 반응이 아니라 파킨슨병의 전조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불안은 공황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솟는다.
마거릿에게 손 떨림은 현재의 생리 반응이 아니라 과거의 이미지다.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몸, 아버지가 점점 자기 몸을 잃어가던 시간. 그래서 그의 마음은 몸의 작은 신호 앞에서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상실로 돌아간다.
트라우마는 거대한 사건 속 장면으로만 돌아오지 않는다. 냄새, 소리, 빛, 심장 박동, 호흡, 근육의 떨림처럼 사소한 감각이 과거를 현재로 끌고 올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수용 감각(Interoception)에 대한 조건화로 설명하는데,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 내수용 감각과 연결돼 동일한 신체가 감지될 때 '불안'이나 '공포'라는 조건화된 반응이 자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수용 감각은 심장 박동, 호흡, 허기, 근육 긴장도 등 신체 내부 장기의 상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다. 흔히 '여섯 번째 감각'으로 불리며 스트레스 관리, 감정 조절 및 직관적 의사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마거릿의 행동 패턴을 이 렌즈로 다시 보자. 그는 동네에 금세 싫증을 내고, 잘하고 있는 일 너머의 무대를 꿈꾸고, 음악에 취해 속도를 낸다. 표면적으로는 자극추구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난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확인 욕구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아버지의 병이 그에게 남긴 공포는 죽음만이 아니었다. 몸이 굳어가고, 삶이 좁아지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통제권을 잃는 상황이다.
그래서 마거릿은 계속 움직인다. 새 동네, 새 기회, 새 역할, 새 속도. 자신의 생동감을 통해 불안을 밀어낸다. 가만히 있으면 몸의 신호가 들린다. 몸의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의 병이 떠오른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고, 다음을 상상하고, 더 큰 무대를 향해 간다.
이런 반응은 경험회피(Experiential Avoidance)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고통스러운 감정, 기억, 신체 감각을 느끼지 않기 위해 행동을 바깥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겉으로는 적극성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움직임이 자기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불안을 못 듣게 하려는 소음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거릿의 능력마저 몸을 통해 발현된다는 것이다. 홍관조와 마주한 뒤 그는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말하고, 타인의 내면을 읽는 능력이 생기고, 생방송 중 자신도 모르게 방언을 내뱉는다. 말하지 않으려 해도 말이 나오고, 알지 못하던 언어가 흘러나오고, 타인의 정보가 자신의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아버지는 병 때문에 몸의 주도권을 잃었다. 마거릿은 외계 신호 때문에 몸이 낯선 메시지의 통로가 된다. 두 사건은 달라 보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같은 공포를 건드린다.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마거릿의 능력은 축복인 동시에 트라우마의 재연이다. 특별한 힘을 얻어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힘이 가장 두려운 방식으로 찾아와서 무너지고 만다.
마거릿에게 몸은 안전한 집이 아니라, 언제든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장소다. 영화는 그 몸을 통해 마거릿을 세계와 연결시킨다. 그는 날씨를 전하던 사람이다. 바람, 구름, 폭풍, 기압의 변화를 읽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직업을 가졌다. 외계 신호 이후 그는 날씨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과 세계의 비밀을 읽는다. 기상캐스터였던 그는 인간과 외계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자가 된다. 하늘의 변화를 전하던 사람이, 이제는 인간 안쪽의 기압을 읽는다.
다니엘이 기차 안에서 마거릿을 진정시키고, 몸을 통제할 수 있게끔 돕는 방식은 상징적이다. 그는 마거릿에게 "괜찮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게 하고, 옆에 있던 현악기의 감촉에 집중하게 한다. 생각을 설득하는 대신 몸을 현재로 데려온다. 숨, 손, 촉감, 눈앞의 사물. 과거의 장면으로 끌려간 몸을 현재의 객차 안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트라우마 치료에 이용되는 그라운딩(Grounding)이다. 과거의 기억에 압도되거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마음을, 오감과 신체 감각을 활용해 현재로 안전하게 되돌려놓는 심리 안정화 기법이다.
마거릿의 여정은 외계의 비밀을 밝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자기 몸을 다시 해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반의 그는 몸의 변화를 병의 전조로 본다. 손이 떨리면 아버지를 떠올리고, 숨이 가빠지면 자신도 무너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기에 이른다. 능력 발현 초기의 그는 몸에 휘둘린다. 알지 못하는 언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의식이 흐려진 상태에서 타인의 결핍과 문제를 건드린다. 이때의 마거릿에겐 능력이 선물이 아닌 침범이다. 아버지의 병을 통해 각인된 공포가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후반부의 마거릿은 달라진다. 그는 사람들의 결핍을 읽고,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말을 건넨다. 그들이 보지 못하던 감정, 말하지 못하던 욕구, 오래 붙잡고 있던 오해를 드러낸다. 관계의 막힌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잃은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에게 아내의 미소를 보여주는 장면은 울림을 남긴다. 마거릿은 노아의 상실을 없애주진 않는다. 죽은 사람을 되돌려주지도 않는다. 대신 상실에 짓눌린 기억 속에서 따뜻한 장면을 건져 올린다. 노아가 고통 때문에 잃어버렸던 얼굴, 슬픔 때문에 흐려졌던 행복을 다시 돌려준다.
마거릿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식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없애지 못하고, 갈등 자체를 마법처럼 지우지도 못한다. 대신 각자가 잃어버린 장면, 외면한 감정, 말하지 못한 진심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능력은 외계적 힘이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힘이다. 타인의 고통을 삭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능력이다.
마거릿의 여정은 몸에 대한 공포에서 몸을 통한 연결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초반의 몸은 병의 전조를 알리는 위험한 장소였고, 중반의 몸은 낯선 신호에 점령당한 통로였다. 후반의 몸은 타인의 상처를 감지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아버지의 병이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상처는 더 이상 마거릿을 무너뜨리기만 하는 기억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몸을 통해, 다른 사람의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된다.
영화가 끝내 마거릿의 입에 남겨둔 말은 "Listen"이다. 거창한 계시도, 친절한 해설도 아니다. 들으라는 말 하나다. 그는 오랫동안 자기 몸의 소리를 공포로만 들었다. 손 떨림은 병의 시작으로, 과호흡은 몰락의 예고로, 몸의 낯섦은 아버지의 운명으로.
하지만 마거릿이 배워야 했던 듣기는 달랐다. 몸을 파국의 증거로만 듣지 않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곧장 재난으로 번역하지 않는 것.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신호를 공포가 아니라 연결의 가능성으로 다시 들어보는 것.
초반의 마거릿은 이 듣기에 서툰 사람이었다. 남자친구가 이사를 꺼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병원에서 깨어난 뒤 갑자기 도망치는 이유조차 연인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속도와 불안을 보지 못한 채, 자기 목표와 자기 공포만을 따라 움직였다. 그런 그가 후반에는 사람들의 결핍을 읽고,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 설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침묵도, 슬픔에 잠긴 사람의 표정도, 관계 안에서 어긋나는 신호도 놓친다.
마거릿은 자기 몸의 배신자가 아니라 자기 몸의 해석자가 되면서 비로소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몸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떨리는 몸을 붙잡고도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세계와 연결되는 사람은 불안을 완전히 지워낸 사람이 아니라, 불안이 밀려와도 끝내 자기 안에 머물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아주경제=이동건 기자 ldg920210@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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