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대 랜드마크] 좋은 경기장은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2026.06.15 00:33
어린 시절 축구를 볼 때는 오직 승패에만 관심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승부를 떠나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선수의 기술에 눈길이 갔다. 어느덧 나이가 지긋해지자 이제는 동료·가족과 함께 응원하고 관중의 열기 속에 섞여 현장 분위기를 즐기는 게 더 큰 즐거움이 됐다. 경기뿐 아니라 그 공간도 축구를 경험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축구 경기장은 엄격한 국제 규정에 따라 설계된다. 국제축구연맹(FIFA) 기준에 따르면 월드컵 경기장은 최소 2만 석 이상의 좌석과 비상시 8분 이내에 대피할 수 있는 동선, 비와 태양열을 피하도록 관객석의 60% 이상을 덮어야 하는 지붕 면적 등 다양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축구장과 관객석 사이 육상트랙도 설치할 수 없다.
대부분 경기장이 비슷한 형태를 띠는 이유다. 이번 월드컵 경기장 역시 6만~8만 명 규모의 대형 경기장이 대부분이다. 모두 첨단 전광판과 개폐식 지붕, 최신 시설 등 기술적 특징을 앞세웠다. 하지만 경기장은 단순히 규정을 충족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선수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축구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자부심의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장 설계의 진정한 가치는 첨단 기술보다 그 장소만의 정체성을 얼마나 담아내는지에 달려 있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 경기장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아크론 스타디움이다. 지난 12일 우리나라에 기분 좋은 첫 승을 안겨준 체코와 조별 예선 1차전이 치러졌고, 19일 멕시코와 조별리그 2차전이 열린다. 이곳은 프랑스 건축가이자 조형 예술가인 장 마리 마소와 다니엘 프제가 설계했다.
많은 경기장이 기술적인 기준을 맞추거나 추상적인 주제로 디자인했지만, 이 경기장은 ‘자연’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은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화산 지형 위에 솟아오른 언덕을 떠올리며 경기장을 디자인했다. 둥근 경기장의 외벽은 경사면을 따라 자란 잔디로 덮여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구릉처럼 보인다. 주변 숲과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건축물과 자연의 경계를 흐린다. 잔디는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여름철 무더위에도 경기장 내부를 시원하게 해주는 차열 기능을 수행한다.
경기장 위에 구름처럼 덮여있는 흰색 지붕은 우천시 비를 모아 경기장 잔디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내부 객석은 시각적으로 빈틈없이 연결됐다. 관중이 한 지붕 아래 하나의 공간 속에서 경기에만 몰입하도록 했다. FIFA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기장 중 한 곳으로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아크론 스타디움과 비슷한 철학을 지닌 경기장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연 친화형 경기장으로 평가받는 제주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위해 지어진 이 경기장은 일건건축의 황일인 건축가가 설계하고 풍림산업이 시공했다. 경기장 외형은 제주 특유의 오름에서 영감을 얻었다. 경기장 바닥을 지하로 파 내려갔고 지붕을 반쯤 기울어진 텐트 구조로 덮어 멀리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를 연상하게 된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의 백미는 막(膜) 구조 지붕이다. 제주 특유의 강한 해풍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의 거대한 지붕 대신 여러 개의 작은 막을 이어 조립하는 방식을 택했다. 해풍이 지붕 위를 타고 지나가 경기장 내부는 상대적으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환경을 유지한다. 막 구조는 관중의 함성을 증폭시키는 동시에 경기장 안내 방송도 또렷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설계 덕분에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2002년 당시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세계 10대 경기장 중 한 곳으로 선정하며 ‘천국 같은 경기장’이라고 평가했다.
아크론 스타디움과 서귀포 경기장은 모두 FIFA의 엄격한 규정을 충족하면서도 단순히 기술적 성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두 지역 모두 세계적인 자연유산과 가까운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두 경기장의 건축가는 모두 화산과 오름, 숲과 바람 같은 자연환경을 경기장 설계에 적극 반영했다. 좋은 경기장은 단순히 경기를 잘 보기 위한 시설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지역의 풍경과 역사, 사람의 기억을 담아내는 장소다. 관중은 경기 결과를 잊더라도 그 공간에서 느낀 경험은 오래 간직한다. 경기장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관중을 수용하느냐보다 얼마나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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