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점도 카페도 ‘슴슴’…성수동에 질린 청춘들, 서촌 매력에 ‘풍덩’
2026.06.14 08:02
서쪽엔 인왕산, 동쪽엔 경복궁이 자리한 서울 서촌. 삼청동·가회동을 중심으로 한 북촌 지역이 화려한 한옥을 자랑하는 ‘양반 동네’라면, 청운동과 효자동 일대인 서촌은 수리되지 않은 한옥과 저층 상가, 통인시장이 어우러진 ‘서민 동네’에 가깝다. 하늘 높이 솟은 북악산이나 북한산과 다르게 커다란 바위가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는 인왕산은 서촌과 닮았다. 긴 세월 ‘슴슴하게’ 자리를 지켜온 서촌은 약 10년 전 조금씩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서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의 바람을 맞고 있다.
서촌의 변화를 살펴보려면 경복궁 복원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위치가 바뀌는 등 여러 차례 수모를 겪은 경복궁은 1990년부터 20년간 진행된 1차 복원 사업을 통해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춰나갔다. 2010년부터 2045년까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게 단장한 경복궁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2010년께 경복궁이 복원 사업으로 조명을 받자, 서촌 입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일대엔 한복 대여점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16년이 지난 지금, 역에 잠시만 서 있어도 대여한 한복을 입고 경복궁으로 향하는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역 일대의 건물 1층 대부분이 한복 대여점이다. 골목 안쪽까지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가게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 하나 서촌의 주요한 변화는 청와대와 연관되어 있다. 서촌은 청와대와 정부청사 인근에 자리해 공무 관련 모임 등이 많은 지역이다. 유독 식당이나 세련된 카페 등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빌라와 다세대 주택이 많다. 한때 대통령 탄핵 시위로 말미암아 몸살을 앓기도 했던 지역이다. 2022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청와대가 전면 개방되자 서촌엔 새로운 풍경이 생겨났다. 청와대 투어를 하려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투어를 마친 이들은 서촌을 탐방했다. 상권 형성에 도움이 될 거라고 반색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존 주민들이 밀려나고 소박한 동네 가게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최근 3~4년 새 서촌은 새로운 풍경을 장착한 채 분기점을 맞았다. 핫플레이스 성수동을 제칠 기세다. 서울 다른 지역 거주민도 ‘여행 가자’며 요즘 찾는 데가 서촌이다. 서촌 특유의 슴슴한 멋을 발견하며 구석구석에 자리한 가게들을 찾는 젊은 층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중심이지만 상대적으로 상권이 발달하지 않아 월세가 저렴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던 의류 편집숍, 전시 공간, 서점 등이 인스타그램 등 에스엔에스(SNS)를 타고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트렌드’와 ‘핫플레이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서촌은 급부상했다.
인스타그램에 폭포처럼 쏟아진 한남동과 성수동, 연남동의 핫플레이스들에 질린 젊은 층에게 서촌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됐다. 산책하면서 들른 작은 가게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촌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서촌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변화를 맞고 있다.
서촌의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를 따라가다 마주치는 네거리 ‘자하문로10길’이다. 자하문로에서 경복궁 영추문을 잇는 이 길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들이 있다. 이 길에서 48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청하식당’과 길 건너에서 14년 동안 문 열었던 ‘라 카페 갤러리’, 그리고 2005년부터 21년간 전시를 연 전시 공간 ‘팩토리2’가 대표적이다. 세곳 모두 올해 상반기에 문을 닫았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들이 떠난 자리엔 새로운 게 들어설 것이다. 요즘 서촌 분위기를 반영한 공간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청하식당이 있던 자리에는 ‘쇼룸 준비 중’이라는 안내가 적혀 있다.
빈 곳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이미 달라진 이 길의 풍경만으로도 예측할 수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이 길에 두개의 스포츠 브랜드 매장이 들어섰다. 지난 4월 문을 연 아디다스 매장과 살로몬 매장이다. 두 매장 모두 ‘러닝’을 표방하고 있다. 경복궁 일대가 서울 시내 대표 러닝 코스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모델인 여성복 브랜드 ‘로라로라’도 신규 매장을 열었다. 이들 외에도 안쪽 골목에선 매주 또 다른 가게가 문을 연다.
서촌에서 가장 많은 ‘인증샷’이 올라오는 곳은 경복궁 돌담길에 새로 문을 연 카페다. 경복궁역 입구에서 돌담길로 가는 길에 문을 연 ‘테일러커피’와 영추문 쪽에 문을 연 ‘카멜커피’가 대표적이다. 통의동 우체국이었던 건물을 그대로 살린 카멜커피 앞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든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대로인 자하문로의 동쪽 창성동과 효자동이 패션 브랜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자하문로 서쪽 통인동과 누하동은 새로운 카페와 베이커리, 소규모 가게들이 주를 이룬다. 연희동의 대표적인 카페인 ‘매뉴팩트’는 지난 2월 누하동에 서촌점을 열었다. ‘인왕산 대충유원지’ 등 유명 카페가 즐비한 필운대로에 또 하나의 신상 카페가 문을 연 것이다.
통인동과 누하동 지역에서 최근 떠오르는 투어가 있다. ‘문구 투어’다. 노트와 볼펜, 종이, 엽서, 다이어리 등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문구류 편집숍을 여행하는 것이다. ‘올라이트’ ‘파피어프로스트’ ‘스물트론스텔레’ 등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형태의 노트와 수십가지 종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만년필 등을 만날 수 있다. 작은 문구류 및 소품 가게들은 새롭게 문을 열어도 서촌의 슴슴한 공기와 잘 어우러진다.
서촌에 밀려들어 오는 변화의 바람에 대한 의견은 저마다 다르다. 잠잠했던 곳에 ‘돈이 돌자’ 서촌에 땅을 갖고 있던 이들은 마음이 들썩이고, 서촌에 처음 발을 들이는 브랜드와 매장은 또 다른 고객을 만날 생각에 설렌다. 반면 긴 시간 터를 잡고 있었던 세입자들은 높아지는 월세에 잠을 못 이룬다. 오랫동안 서촌에 마음을 뒀던 이들은 ‘핫플레이스’라는 해시태그가 서촌 고유의 분위기를 잡아먹을까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바람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공간은 시간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기 마련이다. 급변하는 서울의 상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서촌이 앞으로 어떤 표정을 갖게 될까. 이번 주말에 직접 서촌을 찾아 확인해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안인용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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