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간 전
281명 중 258명이 ‘좌익 혐의’...육사 3기는 왜 공산당 소굴이 됐나 [호준석의 역사전쟁]
2026.06.14 09:55
여수·순천 지구의 숙군 조사반은 육군본부 정보국 빈철현 대위가 지휘하고 이세호, 김창룡 등이 주축이었습니다. 조사반은 광주에 도착한 뒤 3000명을 조사해 남로당 장병 150명을 색출했습니다. 이들은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각자의 부대에서 좌익 세력을 확장하고 빨치산 전술을 연구하며 유사시에 봉기할 계획을 세우던 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군감사령관(헌병사령관) 이병주, 동해안 일대 좌익 총책 강문영, 강창선, 배명종 등이 붙잡혔습니다.
육사 창설 전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만든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10명이나 적발됐습니다. 최남근 15연대장, 김종석 여단장 대리, 조병건 육사 교수부장, 오일균 육사 생도대장 등 남로당의 군 거물들이었습니다. 대구 6연대를 좌익의 아지트로 만든 하재팔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도 체포됐습니다. 이들은 군사영어학교 재학 시절부터 선동적 언행으로 학교 내에서 분쟁을 일으키던 자들이었습니다(경향신문 1976년 12월 2일 자 ‘창군 전야’)
그 뒤를 이어 적발된 것이 육사 출신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정규 군사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5월 태릉에서 창설됐습니다. 그런데 숙군 수사 결과 육사 1기 6명, 2기는 17명이나 적발됐습니다. 수사가 시작되자 전방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해 버린 소령 강태무, 표무원, 숙군에 협조했고 실질적 활동을 하지 않은 점이 참작돼 사면된 박정희 소령도 2기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육사 3기였습니다. 육사를 졸업한 3기생이 총 281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무려 258명이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최종 숙군된 사람은 60여 명에 달했습니다. (<한국전쟁사(1)> (국방부, 1967) 졸업생의 4분의 1 가까이가 처형되거나 불명예 제대한 것입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을 주도하고 국군과 전투를 벌인 김지회, 홍순석도 육사 3기였습니다. 제주4.3사건을 진압하던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해 9월에 처형된 문상길도 육사 3기였습니다. 중령이 몇 명뿐이고 소령이면 매우 높은 계급이던 당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던 육사 3기는 국군의 근간이었습니다.
여수순천사건 이후 전국 각 부대에서 잇따른 동조 반란을 주도한 것도 육사 3기였습니다. 광주4연대는 여수14연대와 함께 좌익의 아성이었습니다. 그런데 4연대 예하 중대 가운데 나주 주둔 중대에서 반란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4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류정탁 대대장(육사 2기)에게 나주 주둔 중대를 인솔해 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나주 주둔 중대장은 육사 3기 김남근 중위였습니다. 류정탁 대위는 나주에서 김남근 중위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고 연대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 나 김남근은 “세면도구나 가지고 갑시다”라며 류 대위를 하숙집으로 유도했습니다. 하숙집 방문을 열면서 안에 두었던 M1 소총으로 저격해 류 대위에게 어깨 관통상을 입힌 뒤 도주했습니다. 그는 중대를 이끌고 입산을 시도했습니다. 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장성 북방 사거리 터널에서 이들을 소탕했습니다. 그러나 김남근은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가 이후 토벌 작전 때 체포돼 총살당했습니다.
군산12연대에서도 동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여수순천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12연대는 순천 탈환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주공 부대인 2대대를 이끈 김희준 대위는 순천의 봉화산 등성이를 오르면서 5중대장 김응록 중위에게 “도로로 진격하는 1중대의 엄호를 맡으면서 계속 진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응록도 육사 3기였습니다.
김응록은 30분 넘게 답신이 없다가 뒤늦게 이런 상황보고를 해왔습니다. “1중대원들이 작전을 거역하고 있으니 대대장이 직접 와서 수습해 주십시오”. 치열한 총성이 들리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이상하게 여긴 김희준 대대장이 본부 요원들과 함께 5중대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야산 위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김응록의 소행이었습니다. 오연수 상사 등이 다쳤고 대대장은 포복으로 현장을 겨우 탈출했습니다. 김응록이 대대장을 유도해 사살한 뒤 12연대를 장악하려 했던 것입니다. 김응록은 이후 김희준 대대장에게 체포됐고 김창룡 특무대장의 조사를 받은 뒤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사사키 하루타카 <한국전비사(상)> 병학사,1977)
공산당 소굴이었던 육사 3기에는 놀라운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남로당 장병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는 숙군 수사의 주역 김창룡이 바로 육사 3기였습니다.
1947년 4월 29일에 발행된 육사 3기 졸업 앨범에는 제1중대 제1구대 소속 김창룡과 김지회가 같은 사진에 실려 있습니다. 불과 1년여 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동기생들의 성향을 꿰뚫고 있던 김창룡의 존재는 육사 3기가 숙군 수사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김창룡은 육사 재학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1947년 1월에 입대한 육사 3기생 가운데는 약 80%가 남로당원이거나 사주를 받고 있는 적색분자였다. 내가 놀란 것은 머지않아 수립될 국군의 기간(基幹)이 돼야 할 사관생도 가운데 적색분자가 이렇게까지 많다는 것이었다.(중략) 생도대장을 위시하여 각 중대장들까지 전부 공산 계열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나는 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도량을 감시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중략)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믿고 도리어 나를 감시할 뿐 아니라 위압하려고 했다. 때로는 나를 감화시켜 공산주의를 전염시키려고까지 했다.”(김창룡 비망록 <숙명의 하이라루> 중)
김창룡이 말한 ‘생도대장’은 육사 생도들의 생활,훈육,군사훈련 전반을 책임지는 지휘관입니다. 3기가 육사에 다닐 때 생도대장은 남로당원 오일균이었습니다. 육사 교장을 지낸 김종석, 조병건 교수부장, 김학림 구대장도 모두 남로당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들은 밤중에 생도들을 불러내 신상 파악을 하는 척하며 사상 교육을 시켰습니다. 1947년 1월 13일 입교해 4월 19일 임관한 육사 3기는 불과 석 달의 짧은 기간 동안 공산주의의 집중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남로당 군맥의 핵심은 오일균 소령과 김종석 중령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에 조직적으로 침투해 수많은 장교들을 포섭했습니다. 오일균에 대한 김창룡의 회고는 이렇습니다.
“육사 3기 생도로 입대한 지 열흘 밖에 안 된 어떤 날 불침번을 서는데 오일균 생도대장의 방에 불이 켜 있었다. 오일균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과자 한 봉지를 내주었다. 그는 수상한 사람이 있거든 숨김없이 보고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관학교에서 반공사상을 가진 생도대장을 발견하고 가까이 할 수 있다는데 나는 참으로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 뒤 나는 김지회, 홍순석, 박호산, 오동기, 이무연 등이 틀림없는 빨갱이라고 보고를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보고를 받고도 오일균이 그들을 불러다가 조사를 한다든지 처벌을 하는 일은 없었고, 대신 그런 보고를 한 내가 도리어 그들에게서 감시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후략)”
숙군 수사가 시작되자 오일균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사팀이 곳곳을 훑었지만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 끝에 수사팀은 마침내 서울 내자동의 한 세탁소에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는 체포된 뒤에도 자신이 오일균이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김창룡과 대면하자 더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폭동과 빨치산 전술에 대해 써놓은 원고도 오일균의 친구 집에서 압수됐습니다.
청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입학한 엘리트였던 그는 일본 육사 재학 중 해방을 맞아 군에 들어갔습니다. 1948년 제주4.3사건 발발 당시에는 제주9연대 대대장으로 제주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내통해 총기와 실탄 수천 발을 제공했습니다. 오일균은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일본군 대위 출신 김종석도 경성고보(경기고 전신)와 일본 육사를 나온 엘리트였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도 없이 지낸 인물이라 행방을 찾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수사팀은 끈질긴 탐문 수사 끝에 충무로3가 사거리에서 남산 쪽으로 올라가다 있는 사찰에서 그를 찾아냈습니다. 기거하던 방의 이불이 유달리 무거워 속을 뜯어보니 빨치산 전술 책자와 남한 일대 작전계획 지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수사기관에서 ‘지난밤 체포되고야 말 것 같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늘 뛰어다니는 군인생활을 하다 방 안에 들어 앉아 있으려니 갑갑해 견딜 수 없었다. 남한에서 좌익이 총궐기 하면 남한을 전복시킬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김창룡 <숙명의 하이라루>) 김종석은 1949년 8월 2일 처형 직전 웃으면서 인민공화국의 적기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 반역한 육사 3기 김지회, 홍순석, 문상길 역시 모두 빨치산 토벌 때 사살되거나 처형됐습니다. 육사 3기생 중에는 물론 남로당원들과 반대의 길을 걸으며 대한민국을 지킨 군인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육사 3기생들은 유난히 거센 역사의 풍파를 맞았습니다. 노재현은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까지 역임했지만 1980년 국방장관 재임 당시 신군부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외무장관까지 지낸 최덕신은 미국으로 이주한 뒤 친북 활동을 하다가 아예 월북해 씻지 못할 오명을 남겼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척이었던 이규광은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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