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낳으라더니 분만실은 시한폭탄…“이러다 사고 날까 무섭다”
2026.06.13 07:21
제주에서 임신과 출산의 거점 역할을 해온 서해산부인과 의원이 오는 8월 문을 닫습니다. 문을 연 지 27년 만의 폐업입니다.
올해 1분기에만 제주 전체 출생아 수의 4분의 1에 달하는 230여 명의 아기를 받아낸 곳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폐원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출산을 앞둔 임신부들을 비롯해 도민사회 전체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갈수록 열악해지는 분만 환경 때문입니다.
■ "사명감만으로 안전한 분만 감당할 수 없어"
병원 측이 밝힌 주된 폐원 배경은 '필수 의료 인력 부족'입니다.
분만실을 유지하려면 24시간 의사가 상주해야 하는데, 의사 단 2명이 외래 진료부터 야간 당직까지 365일 전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 마취과 의사 2명 중 1명이 그만두면서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분만 중 산모의 과다 출혈 등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종합병원에 신속히 보낼 수 없는 것도 문젭니다.
이 병원 김경민 원장은 "위급 상황에서 시설이나 인력 부족을 이유로 전원을 거부하는 현상이 악화되고 있다"며 "의사 개인의 사명감만으로는 더 이상 안전한 분만을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김 원장에 따르면, 제주는 최악의 경우 헬기를 타고 육지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의원급 의료기관 의사가 소방, 공항, 헬기, 도외 상급병원까지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심지어 헬기에 동승해 후송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김 원장은 "홀로 당직을 서며 동네 분만실을 지키는 의사 한 명이 이 모든 응급 시스템을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구조인데, 만약 이송 중 병원에 또 다른 분만 산모가 온다면 대책이 없다"면서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 제주지역 분만 가능 병원 5곳뿐…"제주도 특별기구 필요"
제주지역 대표 산부인과가 문을 닫게 되면서 남은 병원들 역시 걱정이 큽니다.
해당 병원을 이용하던 임산부들이 다른 병원으로 몰릴 때, 기존 의료진이 과부하를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주는 2024년 기준 분만 인력 1명이 담당하는 출생아 수가 112.7명으로 전국 평균인 96.4명을 크게 웃돌아 분만 부담이 컸는데 상황이 더욱 열악해진 겁니다.
제주도는 도내 분만 가능 병원이 6곳이라고 밝혔지만, 이 가운데 1곳은 석 달 전 이미 분만을 중단했고, 또 다른 1곳은 의료진 고령화 등으로 폐원을 고민하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젊은 산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데다, 고위험 분만을 감당할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분만을 중단한 산부인과 원장은 "영입하려고 했던 의사가 다른 데로 가버린 데다 마취과 의사를 급하게 부르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낮은 분만 수가로 입원실부터 수술실, 수유실까지 인건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토로했습니다.
또 다른 산부인과 원장은 "제주에서 월 270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제 제주에서 분만 가능한 병원이 종합병원 2곳과 개인병원 3곳뿐"이라며 "각 병원의 한계를 파악해서 적절하게 분배하고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제주도 특별기구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 헬기 타고 원정 분만 가는 임신부들…응급 분만 공백 왜?
제주는 섬 지역 특성상 분만 병원의 부재는 곧 위험천만한 원정 출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제주에서 아이를 낳지 못해 다른 지역으로 이송된 임신부는 40여 건. 올해는 벌써 2년 전 전체 이송 건수와 맞먹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습니다.
지난해 제주대병원이 고위험 분만과 신생아 집중 치료를 담당하는 '권역모자의료센터'로 지정됐는데도 왜 이 같은 응급 분만의 공백이 반복되는 걸까.
정부 지원을 받는 권역모자의료센터는 최소 4명의 산과 전문의를 둬야 하지만, 현재 제주대병원 산과 의사는 3명뿐입니다. 그나마도 1명은 휴직 중입니다.
채용 공고를 내고 있지만 지원자가 없다 보니,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늘리려 해도 운영에 한계가 있다는 게 병원 측 설명입니다.
■ "아기 낳으려면 대기표 뽑아야 하나"…제주도, 대책 마련 나서
'아이를 낳으라'고 장려하면서도 갈수록 무너지는 제주지역 분만 환경에 도민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KBS SNS와 지역 맘카페 등에서는 '앞으로 아기 낳으려면 대기표 뽑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부터 '도정은 여태 무엇을 했냐'는 비판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고위험 산모가 3명 중 1명꼴로 더 안전한 분만 환경이 요구되고 있지만, 의료 사고 부담과 낮은 분만 수가, 만성적인 의료 인력 부족은 일선 병원들만의 외로운 고민이었습니다.
여론이 악화되자 도의회는 제주도의 안일한 대응을 꼬집었습니다.
지난 10일 제주도의회 보건복지안전위원회 회의에서 강성의 제주도의원은 "현장에서 어려움들이 계속 누적되고 있는데, 극단적으로 폐원까지 가기 전에 뭔가 보완을 해주거나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협의는 전혀 없었느냐"고 지적했습니다.
양제윤 제주도 안전건강실장은 "현장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제주도 상황에 맞는 산모·신생아 응급 의료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각별히 챙겨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주도는 보건복지부의 '모자의료 진료협력 시범사업'에 공모해 병원 간 협력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대책을 내놨습니다. 고위험 임산부 정보를 사전에 공유해 위험에 대응하고 응급 상황 발생 시 전원과 이송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겁니다.
위성곤 제주도지사 당선인은 12일 도내 산부인과 원장들과 긴급 간담회를 갖고 안전 분만 체계 구축을 위한 현안 사항 등을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위 당선인은 "이번 서해산부인과 사안을 의료기관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제주의 필수의료 체계 전반을 점검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속 가능한 분만 의료 환경을 만들어갈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특정 병원과 의료진의 헌신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행정과 공공의료기관, 민간의료기관이 함께 책임지는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전문 인력 확보, 근무 여건 개선, 응급 이송 체계 보완 등 현장의 애로사항을 반영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김경민 서해산부인과 원장은 "현재 도내 산부인과 의사 절반 이상이 60대로, 향후 10년이 지나면 제주에 분만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있을지 걱정"이라며 '필수 의료진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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