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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딸 돌 반지가 날아갔다’…10년 믿은 금은방 사장 벌써 100명 넘게 당했다 [세상&]

2026.06.13 07:46

노후 준비 위해 금과 현금 맡긴 고객들
“배당 주겠다” 약속했던 금은방 잠적


10일 서울 종로구 H 주얼리시티 1층에 있는 F 금은방의 모습. 윤승현 수습기자


[헤럴드경제=정주원 기자] “딸 돌 반지까지 날려 먹은 엄마 때문에…. 학원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40대 직장인 정지은(가명) 씨는 9일 혜화경찰서를 나오며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을 키우는 그는 원래 이번 여름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생계형 일꾼이 돼야 하는 현실이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는 처지가 됐다. 아이의 돌 반지부터 퇴직금에 이어 노후 준비 자금까지 모두 종로의 한 금은방에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H 주얼리시티 1층에서 15년 넘게 영업해 온 금은방 대표 50대 이모 씨는 고객들에게 금 투자 수익과 배당을 약속하며 현금과 금을 받아 챙긴 뒤 잠적한 의혹을 받고 있다. 13일 경찰과 피해자들에 따르면 지난 3일 첫 고소장이 접수된 이후 약 100건 이상의 고소가 이어졌다. 경찰은 각 사건을 병합해 수사 중이다.

아이 적금이라 생각했던 금…10년 신뢰가 만든 투자


정씨와 금은방 대표 이씨 사이의 인연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딸 돌 반지를 맞추기 위해 찾은 금은방에서였다. 금은방 사장은 넉살이 좋았다. 자기도 자녀들에게 금을 사주고 있다거나 금이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정씨는 결혼 전부터 생일이나 기념일이면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작은 금반지를 샀고 딸 돌잔치 때 받은 반지와 친정·시댁에서 선물 받은 팔찌·목걸이·황금열쇠까지 차곡차곡 모았다. 회사에서 근속 기념으로 받은 금도 있었다. 자녀에게 물려줄 적금을 차곡차곡 모은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10년 가까이 모은 금은 어느새 100돈(375g)을 훌쩍 넘겼다. 이씨는 지난해 2월부터 “오래 거래했으니 세공비 없이 금을 바(bar) 형태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고 정씨는 그간 모아뒀던 금을 모두 맡겼다. 딸의 돌 반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던 금은방 사장은 지난해 3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금을 맡겨두면 다달이 배당금을 지급하겠단 것이었다. 100돈의 금을 맡기면 매달 일정 금액의 배당금이나 이자를 주는 식이다. 이씨는 “업자들은 다 이렇게 한다”고 말했다.

정씨는 “오래 거래했으니 알려주는 팁이라고 했다”며 “주얼리시티가 개방된 공간이고 주변에도 금은방이 많아 자연스러운 거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처음 받은 배당금은 약속대로 지급됐다. 배당금 일부를 적금통장에 넣고 또 금을 샀다. 금값이 오르면서 맡긴 금의 가치도 함께 커졌다. 쏠쏠한 투자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씨는 “좋은 정보라고 생각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조심스럽게 소개했다”며 “지금은 그분들까지 피해를 봤을까 봐 죄책감이 크다”고 했다.

9일 서울 종로구 혜화경찰서 민원실에서 고소장을 접수하는 피해자들의 모습. 윤승현 수습기자


향후 금값 상승을 예상해 현재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금을 미리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방식도 쓰였다. 지난 10일 혜화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한 50대 손모 씨는 ‘선구매 후 수령’ 방식으로 약 1000만원의 피해를 봤다.

손씨는 “다른 매장에는 손님이 없는데 그 집만 유독 사람이 많았다”며 “사장이 ‘3개월 뒤에 금을 찾으면 시세보다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권유해 대금을 미리 지급하고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손씨는 7월 금을 인도받기로 했지만 금은방 대표가 잠적하면서 실물을 받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거래했다는 50대 김모 씨도 같은 방식으로 720만원 상당의 피해를 보았다. 김씨는 “돌 반지나 금반지를 맞출 때마다 찾던 곳이었다”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더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처럼 두 가지 방법으로 피해자들에게 투자와 거래를 유도했다. 피해 규모는 소액부터 수억원대까지 다양했으며, 일부 피해자는 지인들과 함께 돈을 모아 투자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무너진 노후 계획…남은 건 죄책감과 불안


두 달 전쯤부터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이씨는 보이스피싱 피해로 계좌가 동결됐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이씨가 ‘금을 돌려줘야 하는데 계좌가 막혀서 금을 사지 못했다’며 지급을 계속 미뤘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쩌나 걱정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정씨는 이씨를 위로했다. 기다려준 보상이라며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금을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아들였다. 이달 2일까지도 통화는 이어졌다. 이씨는 “고객님 건은 꼭 해결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연락은 끊겼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도 남겼으나 답변은 없었다. 그는 “그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모인 오픈채팅방에는 150명이 넘게 참여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누가 얼마나 피해를 봤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상황”이라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오픈채팅방에서는 단체 대응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경찰은 피해자들에게 우선 개별적으로 고소장 접수를 안내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는 “경찰도 사건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점을 인지한 것 같았다”며 “최근에는 피해자들에게 조사 일정 안내 연락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서울 시내 한 금은방에 금제품이 진열된 모습. [연합]


정씨는 “금을 통해 안정적인 노후를 준비하려 했던 평범한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며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계획을 모두 접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생계를 우선해야 하는 현실이 딸에게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인근 상인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H주얼리시티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15~16년 장사한 사람인데 (그랬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금을 맡기면 이자를 많이 줬다고 하더라. 그러다 자금이 부족해진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귀금속업계 전문가는 고객 자산을 운용해 배당이나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 자체가 일반적인 금은방 영업 형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귀금속 판매장을 운영하는 윤중현(52) 씨는 “처음에는 이자를 많이 주면서 신뢰를 쌓고 이후 돌려막기식으로 운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양희재 IBS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피의자 명의의 재산이 없다면 피해자들이 돈을 돌려받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재산 은닉 여부 등은 수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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