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팩토리·HBM보다 삼겹살… 그들의 ‘한 끼’가 궁금한 까닭은
2026.06.13 00:31
“어디서, 뭐 먹었대?”
시선 쏠리는 거물의 밥상
고깃집 ‘형님 저요’, 치킨집 ‘BBQ’와 ‘깐부치킨’, 삼계탕집 ‘토속촌’, 평양냉면집 ‘우래옥’….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를 이끄는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서울에 머문 닷새 동안 들른 식당 리스트다.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과 연달아 회동하며 친목을 다지고 초대형 비즈니스 논의를 이어간 자리였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은 그들의 대화 내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어느 식당에 갔는지, 어떤 메뉴를 주문했는지, 어떻게 음식을 먹었는지가 화제가 됐다. 그가 들른 식당마다 사람이 몰렸고,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젠슨 황은 ‘맛잘알(맛을 잘 아는 사람)’” “이 정도면 한식에 진심” 같은 반응이 나왔다.
글로벌 명사나 재벌 총수, 정치인 등 거물들의 한 끼가 화제가 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왜 그럴까.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젠슨 황의 방한 기간인 지난 5~9일 ‘젠슨 황’과 ‘삼겹살’ 키워드가 함께 등장한 기사는 1178건에 달했다. ‘젠슨 황’과 ‘치킨’이 함께 언급된 기사도 583건이었다. 이번 방한의 핵심 의제로 꼽힌 ‘AI 팩토리’가 등장한 기사는 674건, ‘HBM(고대역폭메모리)’은 646건, ‘파운드리’는 105건이었다. 회동의 의제보다 식탁에 오른 음식이 더 많이 기사화된 셈이다. 지난해 방한 때도 비슷했다. 젠슨 황은 작년 10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 참석을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당시 그는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깜짝 ‘치맥’ 회동을 했다. 이틀 동안 ‘젠슨 황’과 ‘치킨’이 함께 등장한 기사는 573건이었다. 온라인에서는 회동이 이뤄진 매장과 당시 메뉴를 정리한 글이 공유됐고, 식당에는 ‘성지 순례’ 발길이 이어졌다. 젠슨 황이 앉았던 자리에 손님이 몰리자, 깐부치킨은 해당 테이블의 이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했다. 당시 식탁에 올랐던 메뉴를 묶은 ‘AI 깐부 세트’도 내놨다.
식당과 메뉴를 둘러싼 호기심이 젠슨 황에게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2018년 2월 이재용 회장이 석방돼 자택으로 돌아온 날, 대중의 시선은 의외의 장면으로 향했다. 자택 앞 상황을 생중계하던 한 유튜버의 화면에 치킨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하는 모습이 잡히면서다. 온라인에서는 그가 어떤 브랜드의 치킨을 주문했는지를 두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2021년 12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인스타그램에서 자신의 식성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재벌은 한국 치킨 안 먹나?”라는 질문에 “교촌치킨 마니아”라고 했고, “마라탕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데 좋아는 한다”고 했다. 궁금증은 실제 발길로도 이어진다. 2023년 12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과 이재용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부산 깡통시장의 한 분식집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공개되자, 해당 분식집은 ‘회장님들이 다녀간 곳’으로 알려지며 지역 명소가 됐다.
유력 정치인들이 찾는 식당과 식탁에 오른 메뉴 역시 관심의 대상이다. 청와대의 귀빈 초청 만찬 메뉴도 빠지지 않는 관심사다. 지난달 19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안동찜닭의 원형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닭요리 ‘전계아(煎鷄兒)’를 대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포털사이트에서는 ‘전계아’ 검색량이 급증했다. 낯선 옛 음식이 정상회담 식탁에 오르자,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음식인지 찾아본 것이다.
유명인의 식탁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복잡한 회동의 의미는 해석이 필요하지만, 식탁 위 메뉴는 누구나 금방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협력, 글로벌 공급망, 정상 외교 의제는 추상적이고 어렵지만, 삼겹살과 치킨, 떡볶이와 전계아는 구체적이고 쉽다. 그들이 먹은 음식을 통해 멀게만 느껴지는 ‘그들의 세계’를 가깝게 느끼는 것이다. 모방 심리도 작용한다. 특정 제품을 소비하며 그것을 소비하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파노플리 효과’가 식문화와 결합한 결과다. 젠슨 황이 찾은 식당에 가보고 이재용 회장이 뜯은 치킨을 주문해 먹어보며, ‘그들의 세계’에 잠시나마 닿은 듯한 느낌을 얻는 것이다. 이용재 음식평론가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음식의 맛은 정서적인 영역”이라며 “사람들은 유명인이 좋다고 말한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의 취향이나 감각이 격상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대중이 거물들의 식탁을 이런 방식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유명인들도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글로벌 기업의 CEO가 고급 호텔 레스토랑이 아닌, 시끌벅적한 삼겹살집과 치킨집을 찾으면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사람’ ‘소탈한 리더’로 읽힌다. 정치인이 시장 음식을 먹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권위적으로 보였던 인물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대중은 심리적 장벽을 허문다. 식사는 가장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때로는 가장 정교하게 연출된 장면이 된다.
유명인이 다녀간 식당이 순식간에 명소로 떠오르는 현상에는 기복적 소비의 성격도 있다. 유명인들이 다녀간 식당을 찾아가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들이 먹었던 음식을 먹는 행위의 기저에는 비범한 기운을 나눠 받고 싶다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이용재 평론가는 “음식은 사생활 가운데 가장 양지에 있고 접근이 쉬운 영역”이라며 “유명인은 소탈한 음식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고, 대중은 그 음식을 따라 먹으며 ‘좋은 기운’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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