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 전
교사 시절 정점식, 이중섭 전시 돕고 ‘은지화’ 선물 받기도
2026.06.13 00:18
예술가와 친구들
일곱 살이 된 정점식은 대구 약전골목에서 한약방을 하던 고모부에게서 한문·서예·그림을 배웠다. 이때 평생의 교양이 되는 필묵을 몸에 익혔다. 1925년 계산동 성당 구내의 해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한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대성학원 문과에서 수학했다. 스무살이 된 1936년에는 대구에서 열린 ‘제1회 남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김용조·박재봉·서진달 등의 화가들과 친했다. 1937년, 대구 남산동 657번지 교남학교(대륜고의 전신) 근처 코스모스 서점 2층에 화실을 열었다. 그해 겨울 만주 하얼빈과 소만 국경의 헤이허(黑河)로 여행을 떠났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격렬하게 진행되던 만주 모더니즘을 목격했다.
1938년, 정점식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전통 일본화와 근대미술을 결합한 신일본화의 거점 도시였던 교토답게 서양화에서도 아카데미즘과 실험적인 미술이 혼재하고 있었다. 새로운 미술이 갈급했던 정점식은 서구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기하학적 추상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동경의 ‘독립전’에 출품했다. 김환기와 유영국 역시 독립전의 출품작가였다.
계간미술이 뽑은 한국의 추상화가 10인
안정적인 만주의 생활이 지루했다. 미술이 그리웠다. 1943년, 정점식은 하얼빈 시내로 나왔다. 만주국의 국유림 벌채를 관리하던 만주임산공사에 취직했다.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일본인·중국인·조선인 화가들이 참여한 하얼빈미술가협회전에서 쌍화상(雙畵賞)을 수상했다. 이 무렵 정점식은 백계 러시아인(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한 러시아인)이 만들어 팔던 조잡한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들에게서 유화 물감 제조법을 배운 건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45년 8월 9일 만주에 소련군이 쳐들어 왔다. 일본 관동군은 궤멸하였다. 하얼빈은 혼란에 빠졌다. 하얼빈에 머물던 일본인 화가 쓰다 세이슈(律田正周, 1907~1952)가 몸을 피해 정점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동경 문화학원의 미술강사를 지낸 쓰다는 꽤 유명한 화가였다.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여성과 동거를 감행할 정도로 이채로운 인물이었다.
쓰다와 정점식은 3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정점식의 스케치북을 본 쓰다는 “당신은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스페인 풍토나 문화적 배경 밑에서 나올 법한 그림”이라는 칭찬을 했다. 당대 일류 화가의 칭찬이자 격려였다. 정점식은 고무되었다. 쓰다의 문화학원 제자인 이중섭· 유영국·김병기·송혜수 등을 정점식은 나중에 한국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쓰다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부인이 임신 중이어서 정점식 일가는 곧바로 귀국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창춘(長春), 무단강(牧丹江), 투먼(圖們) 등을 거쳐 귀국했다. 기차가 없으면 아이들을 업고 무거운 짐을 진 채 길을 걸었다. 장녀는 이미 하얼빈에서 잃었고, 첫째 아들 역시 힘든 여정에서 잃었다.
1950년 6월 24일 밤 11시에 대구역을 출발한 정점식은 다음날 새벽에 영등포역에 내렸다. 하얼빈의 백계 러시아인에게서 배운 대로 정점식은 유화 물감을 직접 만들어 쓰고 있던 터였다. 영등포에는 수제 유화 물감을 담을 튜브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튜브를 사러 떠난 길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기차표를 구해 6월 25일 낮에 대구로 되돌아왔다.
피란민들이 대구로 몰려들었다. 김팔봉·마해송·구상·최정희 등 문인과 예술가들도 대구로 몰려들었다. 문예 월간지 ‘신태양’이 대구에서 창간되었다. 향촌동 골목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가 문을 열었다. 전쟁통에도 문화는 지치지 않았다. 정점식은 종군화가단 소속 간사로 활동했다. 1953년 6월, 제1회 개인전을 대구역 앞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열었다. 가족을 처가가 있는 마산에 남기고 혼자서 대구에서 생활하던 마해송이 영남일보에 전시평을 써주었다.
1954년, 정점식은 계성고등학교 미술 교사가 되었다. 1955년 4월,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렸다. 이중섭이 계성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정점식은 도움을 주었다. 계성고 학생들은 완성된 이중섭의 그림을 미국공보원까지 날랐다. 정점식은 이 전시의 안내장에 축사를 썼다. 전시장 지킴이는 계성고 3학년 권기호가 맡았다. 이중섭은 정점식의 집을 찾아왔다.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은지화를 몇 장 선물했다. 정점식은 나중에 그 은지화를 후배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다.
1964년, 계명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론과 실기를 다 강의했다. 일본미술잡지 ‘미즈에’를 비롯해 늘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1970년대의 미대 학생들은 대학미전에 관심이 많았다. 계명대 미술대학 로비에 출품작을 늘어놓고 있으면, 정점식이 지나가다가 대학미전 같은 공모전은 작가가 되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미술을 하려면 혼자서 자신의 조형 어휘를 찾아 나가는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정점식의 한 세대 아래 화가인 이강소 등이 주동하여 1974년, ‘제1회 대구 현대미술제’가 열렸다. 전시 장소는 계명대 미술대학 4층 전시장이었다. 정점식과 박서보가 강연을 맡았다. 정점식은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정점식 같은 현역 작가가 일찍부터 현대미술의 이론적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온 대구는 현대미술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정점식은 지적 호기심이 많았다. 그의 호 극재(克哉)처럼 새로운 변화를 피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혀 극복하는 삶을 살았다. 딸이 사는 뉴욕을 방문하면 꼭 백남준을 만났다.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와 사이가 각별했다.
정점식미술이론상 올해로 5회 맞아
대구에는 정점식의 작품을 애호하는 컬렉터가 많았으나 정점식은 작품 판매를 자제했다. 다행히 도상봉·유영국·정점식이 함께 만든 중학교 미술 교과서가 잘 팔려 1년에 한 번 부인이 목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지나친 자제력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무능한 가장이 되고 말았지만, 후배 작가와 교수들로부터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어떤 제자는 길쭉길쭉한 그의 독특한 필체를 따라 하기도 했다. 1978년 ‘계간미술’이 뽑은 ‘한국의 추상화가 10인’에 선정되었다. 화가 이대원·이준·류경채 등과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친교를 맺었다.
대구 중앙통의 일식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입이 짧았는데, 창란·명란·울외장아찌는 좋아했다. 안주 없이 양주 반병을 거뜬히 비우는 실력이었다. 술을 마시고 귀가해도 서재에서 한 시간은 책을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영원한 잠에 든 지금은 막내딸 정영주가 정점식의 제사상을 차린다. 제사상에 생과자는 꼭 챙긴다. 대구미술관과 유족이 설립한 도솔문화원이 공동으로 제정한 ‘정점식미술이론상’은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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