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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만나는 약선(藥膳)]더위를 풀어주는 천연 백호탕, 수박

2026.06.12 11:31

수박


저녁상 물린 멍석 위에 두레상이 차려졌다. 마당 한편의 매운 모깃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낮부터 우물에 담가 놓았던 수박을 보았기 때문이다. 칼 끝에 쫙쫙 갈라지는 붉은 환호성은 여름밤의 축제였다. 할머니는 수박 속껍질이 아깝다며 수저로 박박 긁어 불그레한 화채를 만들었다. 사카린 맛이든 수박 맛이든 개의치 않았다. 마냥 수저 부딪쳐가며 달게 먹었던 유년이었다.

수박의 고향은 아프리카 열대 사막 지역으로 추정한다. 아프리카 신석기 유적지에서 수박 씨앗을 발견했다. 야생 수박은 쓴맛이 강하다. 하지만 건조한 지역의 소중한 천연 수분 저장고였고 생명의 물이었다. 뜨거운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수박이 열리는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도 수박이 등장한다. 여러 파라오의 무덤에서 수박 씨앗이 나왔는데, 이는 사후 세계로 가는 긴 여정 동안 목을 축이라는 의미로 함께 묻어준 것이다. 중국에는 10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해 수박이 전파되었다.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고 '서과(西果)', 서쪽에서 온 박이라는 뜻의 '서과(西瓜)'라 불렸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충렬왕 때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러 온 몽골의 장수 홍다구(洪茶丘)가 개성에 수박을 처음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수박


조선 시대 왕실 잔칫상에 오른 수박은 단순한 후식이 아니었다. 수박의 크고 붉은 과육은 길상(吉祥)과 풍요를 상징한다. 또한 더위로 인한 갈증과 열을 식혀주는 계절 약선이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수박과 들쥐'는 자연만을 묘사하지 않았다. 수박은 씨가 많아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쭉쭉 뻗어 나가는 넝쿨 역시 가문이 대대손손 이어지기를 바라는 표현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수박을 '천연 백호탕'이라 부른다. 수박을 먹으면 마치 백호탕을 마신 듯 열을 내리고 갈증을 풀어준다는 데서 별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원래 '백호탕(白虎湯)'은 가슴이 답답하고 입이 마르며 극심한 열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청열제(淸熱劑) 처방이다. 열을 다스리는 위력이 서방을 관장하는 백호(白虎)와 같다고 하여 '백호탕'이라 부른다.

조선 전기의 '식료찬요'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식이요법서이다. '상한(傷寒)으로 인한 열병에 목이 마르는 증상이 있으면 마땅히 수박[西瓜]과 배를 먹는데 모두 갈증을 그치고 감기 뒤끝의 남은 열을 없애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박은 그야말로 천연 해열제였다. 현대 영양학적으로도 수박의 라이코펜(Lycopene) 성분은 토마토보다 높으며, 수박씨는 콜레스테롤을 낮춰준다고 하니 볶아서 차로 이용해도 좋으리라.

수박


'수박 겉핥기' 식으로 겉만 대충 보았다면, 이제부터는 사물의 속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대동강 장마철의 '능라도 수박' 같은 밍밍한 음식을 먹을 이유도 없다.

어린 날 생쑥 연기에 매운 눈 비비며 눈물 콧물 찍어내던 모깃불은 사라지고 전자 벌레퇴치기가 자리한다. 십 촉 백열등 닮은 달빛, 교회당 창문에 매달린 알전구를 밤하늘에 박아놓은 듯 반짝이던 별빛은 어디로 갔나. 키 큰 가로등만이 골목을 지킨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유년을 건져놓고 선풍기 대신 손부채를 들었다. 마트에서 사 온 큼직한 수박 한 통을 바라본다. 어린 손주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할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한다.

내리 쪼갠 수박이 모양은 초승달 같은데(西瓜斜割月生稜)

씹어 삼키니 뼛속까지 서늘해짐에 놀랐네(嚼罷渾驚骨欲氷)

이때 서늘한 기운 생김을 이미 깨달았거니(已覺此時生爽塏)

다시 어느 곳에서 더위를 피한단 말인가(更於何處避炎蒸)-서거정 '수박[西瓜]'

노정희 대구한의대 푸드케어약선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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