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는 넘치는데 세상은 왜 안 바뀔까?(feat. 과잉정치)[딥다이브]
2026.06.11 10:01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정치 활동이 유난히 활발했던 지난 10년. 하지만 그 많았던 대규모 시위가 무엇을 남겼는지 따져보면 좀 애매합니다. 정치적 에너지는 넘치지만, 실질적 변화를 만들어내진 못하는 상황. 벨기에 역사학자 안톤 예거(Anton Jäger)는 이를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 즉 ‘과잉정치’라 칭하죠. 정치가 넘치는 과잉정치 시대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안톤 예거의 저서 ‘하이퍼폴리틱스’와 그의 칼럼·인터뷰, 그리고 관련 서평을 참고해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6월 10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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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치의 종말, 정치의 부활
2000년대만 해도 선거철이면 으레 저조한 투표율을 걱정하는 기사가 나왔던 걸 기억합니다. 2008년 18대 총선은 투표율이 고작 46.1%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었죠. 미국 역시 1990년대~2000년대 정치적 무관심이 극에 달했는데요.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을 끄고 의사결정은 엘리트(기술관료)에 맡겨버리는, 이른바 ‘탈정치(Post-Politics)’의 시대였습니다.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얼마 전 한국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61%로 31년 만에 가장 높았고요(1995년 68.4% 이후 역대 2위). 1996년 51%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대선 투표율은 2020년 66.6%, 2024년 64%로 역사적인 고공행진을 이어갑니다.
대규모 정치적 시위는 점점 빈번해지고 있죠. 미국에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Black Lives Matter(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엔 역사상 최대 규모인 2600만명이 참여했고요. 올해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노킹스‘ 시위엔 800만명이 동참했어요. 또 지난해 벌어진 미국 대학가의 친 팔레스타인 시위와 미국 각지에서 벌어진 이민 단속 반대 시위까지. 정치적 집회가 끊이지 않죠.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무려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이후 40여 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죠. 그만큼 정치적으로 뜨거운 시기란 뜻입니다.
이런 추세는 유럽도 마찬가지에요. 2014년 역대 최저(42.6%)로 떨어졌던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은 2024년 30년 만에 최고치(51%)를 기록했고요.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에도 스페인에선 주택난 항의 시위가, 영국에선 반이민 시위가 거세게 일었죠.
정리하자면 탈정치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정치가 다시 살아 돌아왔어요. 그것도 이전보다 한층 강해져서 말이죠. 안톤 예거에 따르면 최근 미국과 유럽의 ‘정치화(정치 참여 열기)’ 수준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대두로 혼란스러웠던 1930년대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시위의 규모와 빈도, 정치적 테러 시도, 투표율 같은 수치를 종합한 결과이죠.
이제 정치는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있는 거죠.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지, 어떤 스포츠를 보는지,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 캐스팅(PC주의 논란)에까지도 정치가 침투했어요. 문화도, 경제도 모두 정치의 영역이 된 겁니다.
시위는 많은데 변화는 없다
여기까지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정치 참여 열기가 높아지면 좋은 거 아닌가? 그게 뭐가 문제지?네, 시민들이 다시 정치에 열을 올리는 것,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무관심한 것보다는 훨씬 낫죠. 안톤 예거가 지적하는 건 지금의 정치화가 너무 허무하단 겁니다. 폭발적인 에너지에 비해 실질적으로 이뤄내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인데요.
앞에서 언급한 미국 역사상 최대 시위였던 2020년의 ‘Black Lives Matter(BLM)’를 볼까요. 이 운동은 요즘의 많은 시위가 그렇듯이 조직적인 리더가 따로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결집한 군중들이 주인공이었죠. 그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경찰 예산 삭감’이었고요. 그래서 대대적인 시위 이후 어떤 성과가 있었을까요? 전혀요. 2021년 관련 법안은 상원에서 좌초됐고요. 삭감됐던 경찰서 예산은 바로 복원되거나 오히려 더 늘었습니다. 경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22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죠.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수백, 수천만명이 모이긴 했지만 ‘조직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셜미디어 선동가가 시민들을 끌어모아 순식간에 거리를 점령하게 만들 수는 있죠. 하지만 정책을 바꾸는 건 길고 지루한 작업입니다. 지속적인 조직 없이는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어요.
SNS를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왔지만 지속성은 없는 정치활동. 이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는 공통 현상입니다. 예거는 인종 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한 미국 ‘BLM’ 시위와 2021년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부정선거론자들이 조직 측면에서 보면 유사하다고 지적하죠. 지속 기간이 짧고, 회원 명부가 유지되지 않고, 지지자들이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성과는 미미하고, 결과는 공허합니다. 분노가 폭탄처럼 터지면서 연기만 자욱했을 뿐, 정작 기존 권력이 입은 실질적 타격은 거의 없죠.
예거는 이를 ‘탈 제도화’ 현상과 맞물려 설명하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제도화된 참여, 즉 정당·노동조합·종교단체·시민단체 등에 회원으로 가입된 사람이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최저 수준이죠. 그 결과 온라인엔 정치적 표현이 넘치지만, 이를 제도의 틀로 끌어올 만한 연결고리는 매우 약해진 상황입니다. 이를 그래프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죠.
정치도 주식처럼 단타 치는 시대
시민의 정치적 관심은 매우 활발하게 분출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조직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한 상황. 이것이 ‘하이퍼폴리틱스(Hyperpolitics)’의 정의입니다. 번역하자면 ‘과잉 정치’쯤 되겠죠.소셜미디어가 이런 과잉정치의 토양이 됐다는 건 너무 당연한 분석입니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정치적 의사 표현에 드는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졌죠. 굳이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도 밈과 해시태그 공유만으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예거는 이러한 “낮은 헌신과 낮은 비용”이 하이퍼폴리틱스의 특징이라고 지적해요. 정치 참여의 문턱이 확 낮아진 대신, 언제든 팔로워를 취소하고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거죠. 당연히 인내심이 부족하고 지속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데요.
이를 두고 예거는 개인의 정치 참여가 주식시장 투자자의 행동방식과 비슷해졌다는 분석도 내놨습니다. 꽤 그럴 듯한 비유인데요. “투자수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즉시 자원을 회수하는” 주식 투자자처럼 정치 참여도 인내심 없이 단기에 그친다는 거죠. 그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선 이렇게 표현했어요. “마치 정치 주식시장의 변동처럼, 투자자들은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몰려들지만 내일이면 다시 팔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영국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도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요. “정치가 점점 더 온라인 현상이 되어가면서 과거 금융시장의 전유물이었던 거품, 폭락, 광풍에 똑같이 노출돼있다”는 설명입니다.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식어버리고 다른 테마로 쉽게 정치적 관심이 옮겨가곤 하는 거죠.
아마 지금까지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데?
사실 답은 이미 나와있죠. 온라인상의 일시적인 폭발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집단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문제는 이제 와서 갑자기 사람들을 정당에 가입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하느냐인데요.
안톤 예거는 “일상생활 속 공통의 관심사”를 강조합니다.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보육·간병·주거처럼 매일 맞닥뜨리는 일상의 문제에서 출발해야만 의미 있는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죠. 에이, 너무 뻔한다고요? 그런데 그걸 아직 깨우치지 못한 정당과 정치인이 많은 듯한 건 왜일까요.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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