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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칩’ 앞세워 반도체 상식 뒤집다 [미장보석주]

2026.06.10 21:01

(49) 세레브라스시스템스(CBRS)


최근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화두는 ‘메모리 월(Memory wall)’이다. 말 그대로 메모리가 만든 벽이다. 메모리 월은 연산장치가 필요한 데이터를 제때 받지 못하는 모든 구간에서 생긴다. 예를 들어 칩 안에서 연산장치와 메모리 사이가 막힐 수 있다. 서버 안에서 CPU, GPU, 메모리를 오가는 과정도 병목이 된다. 데이터센터 단위로 가면 서버와 서버를 잇는 네트워크도 문제다.

세레브라스가 주목한 곳은 이 중 가장 안쪽이다. 칩 내부의 메모리 월이다. 보통 반도체는 둥근 웨이퍼 위에 여러 개 칩을 만든 뒤 잘라서 쓴다. 세레브라스는 웨이퍼를 자르지 않는다. 300㎜ 웨이퍼 전체를 하나의 칩처럼 쓴다. 이 안에 연산장치와 메모리를 최대한 붙여 넣었다. 세레브라스는 이를 ‘웨이퍼 스케일 엔진(WSE-3)’이라고 표현한다. 세레브라스가 지난 4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증권신고서(S-1)에 따르면, WSE-3 면적은 엔비디아 B200 칩 면적의 58배 수준이다. 트랜지스터(전기 신호 스위치) 수도 19배, 칩 내장 메모리도 250배에 달한다.

시장에서도 주목한다. 세레브라스는 지난 5월 14일(현지 시간)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공모가는 185달러, 공모 물량(클래스A 기준)은 3000만주다. 총 공모 금액은 55억5000만달러다. 이후 주가는 빠르게 치솟은 뒤 조정 국면이다. 6월 3일 기준 종가는 214달러다.

월가에서는 향후 전망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낙관론 진영은 오픈AI와 아마존웹서비스(AWS)가 세레브라스를 선택하면서 ‘엔비디아 대안’ 스토리에 힘이 붙었다고 평가한다. 246억달러 수주잔고도 성장성을 보여주는 숫자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부정적 시선도 상당수다. 특정 고객 의존도가 높은 데다 수주잔고의 매출 전환 여부도 확신할 수 없다는 논리다. 금융 전문 매체 벤징가는 “2025년 매출 대부분이 중동 지역 고객에서 발생했다”며 “오픈AI와 AWS는 수주잔고에 머물러 있어 지켜봐야 한다”고 짚었다.

‘크면 깨진다’ 상식 깬 WSE

AI 병목 대안 중 하나로 부상

WSE는 반도체 업계의 상식을 뒤집었다. 그동안의 반도체 칩은 둥근 웨이퍼 위에 수백 개 칩을 만든 뒤 이를 잘라내는 형태였다. ‘수율(양품 비율)’ 때문이다. 칩이 작으면 웨이퍼 일부에 결함이 생겨도 나머지 칩은 살릴 수 있다. 반대로 칩이 커질수록 위험은 커진다. 전력 공급과 냉각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반도체 업계에서는 칩을 작게 만들고, 여러 개를 연결해 성능을 높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세레브라스는 정반대 길을 택했다. 웨이퍼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썼다. 대신 결함을 우회하는 구조를 심었다. 웨이퍼 안에 문제가 생긴 부분이 있으면 해당 구역을 꺼두고, 데이터가 다른 경로로 흐르도록 설계했다. 도로가 막히면 우회도로로 차량을 돌리는 형태다. 세레브라스는 이를 ‘결함 허용 방식(Fault-tolerant architecture)’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수율 개선을 위해 비슷한 방식이 쓰여왔다. 일부 셀이 불량이면 이를 꺼두고 여분의 셀을 활용하는 식이다. 다만 프로세서는 메모리보다 구조가 훨씬 복잡하다. 세레브라스는 “프로세서 시장에서 결함을 우회하는 형태는 우리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정적 메모리(SRAM)를 극대화해 쓴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다. SRAM은 D램(동적 메모리)과 달리 전원이 공급되는 한 저장된 내용을 계속 기억한다. 저장 용량은 작지만 주기적 갱신이 필요 없어 지연도 적다. 문제는 비싸고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세레브라스는 S-1에서 “기존 업체들은 칩에 공간이 부족해 SRAM을 많이 쓰지 못했지만, 우리는 B200보다 58배 큰 칩을 만들어 빠른 온칩 SRAM을 극대화했다”며 “우리가 극한의 빠른 속도로 추론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엔비디아 B200과 비교한 세레브라스 WSE-3 크기. (세레브라스 제공)
알고 보면 IPO 재수생

중동 → 중국 자본 의구심 받기도

세레브라스의 기업공개(IPO)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4년 9월에도 나스닥 상장을 추진했다. 시장 관심은 상당했다. 엔비디아가 장악한 AI 반도체 시장에 도전하는 스타트업이라는 점만으로도 주목받았다.

발목을 잡은 건 고객 구조였다. 당시 세레브라스 매출은 아부다비 AI 기업 G42 의존도가 컸다. 2023년 G42에서 발생한 매출이 전체 83%에 달했다. 문제는 G42는 단순 고객이 아니었다. 세레브라스의 주요 투자자였다. 우선주 투자와 대규모 선지급금을 통해 세레브라스 성장을 뒷받침했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 등 미국 규제당국은 이 지점을 민감하게 봤다. 특히 당시 미국 정치권에서는 중동 기업이 중국의 대중국 제재 우회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던 시기다. 더군다나 G42 최고경영자(CEO)인 펑 샤오가 중국계 미국인인 탓에 의구심을 키웠다. 논란 끝에 세레브라스는 CFIUS 심사를 통과했다. 다만 심사를 기다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IPO를 그대로 이어가기엔 부담이 커졌다.

세레브라스는 이번 IPO 과정에선 오픈AI와 AWS를 앞세웠다. 오픈AI와는 200억달러 이상 규모의 장기 계약을 맺었다. AWS는 세레브라스 시스템을 자사 데이터센터에 배치하는 첫 하이퍼스케일러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 한편에선 의구심이 제기된다. 매출만 놓고 보면 무게중심이 중동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S-1에 따르면 2025년 매출(5억999만달러)의 62%는 모하메드 빈 자예드 인공지능대학(MBZUAI), 24%는 G42에서 나왔다. MBZUAI와 G42가 긴밀한 관계란 점도 논란이다. 세레브라스도 S-1에서 두 곳을 회계상 관련당사자로 분류했다. 쉽게 말해 서로 이해관계가 얽힌 기관이라는 의미다. 실제 MBZUAI 이사회 구성원에는 G42 CEO인 펑 샤오가 포함돼 있다.

오픈AI 계약도 마냥 호재로 보긴 어렵다. 세레브라스는 오픈AI와 200억달러 이상 규모 장기 계약을 맺고, 향후 3년간 750㎿ 규모 추론 컴퓨팅 용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엔비디아 중심 AI 인프라 시장에서 오픈AI가 세레브라스를 선택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크다. 다만 계약 구조를 보면 오픈AI가 거래를 뒤흔들 수 있는 형태다. 오픈AI는 단순 고객이 아니다. 세레브라스에 10억달러를 빌려줬고, 향후 세레브라스 지분을 받을 수 있는 권리(워런트, 신주인수권)도 확보했다. 세레브라스 입장에서 오픈AI는 고객인 동시에 자금 조달처고, 미래 주주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세레브라스는 오픈AI 입맛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부담을 떠안은 꼴이다.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도 주의할 지점이다. S-1에 따르면 오픈AI는 보통주 최대 3344만5026주를 주당 0.00001달러에 살 수 있는 워런트를 갖고 있다. 공모 물량보다 많고, 완전희석 기준 전체 주식 수의 10% 안팎에 해당하는 규모다. 워런트 행사 시 기존 주주 지분율 희석이 불가피하다.

벤징가는 “투자자라면 8월 공개될 첫 실적 발표를 지켜봐야 한다”며 “오픈AI와 AWS 합산 매출이 분기 매출의 40%를 넘지 못한다면, 회사 측의 매출원 다각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63호(2026.06.10~06.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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