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내 이야기
2026.06.10 05:02
ㄷ아파트는 화물차를 정리하고 경비원으로 일한 첫 직장이었습니다. 경비원은 입주민이 오가는 길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그분들의 필요를 살펴 불편을 줄이는 사람입니다. 일을 못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친절”(회사가 지노위에 제출한 해고 사유 중 하나)이라고 억지 꼬투리 잡을 만큼 열심히 일하면서도 주민들에게 잘 보이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 성실은 평생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제 삶의 태도였습니다.
길고양이 밥 준 일로 아파트 경비직에서 해고된 뒤 송영경(가명·해고 반대 주민☞18회 ‘갑을관계의 최전선에서’) 사모님이 제 살아온 시간을 글로 써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억울한 마음 누르지만 말고 한번이라도 터뜨리라는 말씀에 용기를 냈습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버린 크고 작은 이면지 조각들을 모아 5장에 나눠 적었습니다. 제 인생을 쓴 처음이자 마지막 글입니다.
“첩첩산중 시골 마을에 10살 소녀(박수일 “소년이라고 쓰는 줄 몰랐습니다”)가 엄마와 살고 있었다. 그런대(데) 그 집은 하루 끼니 이어갈 식량이 없어서 이 소녀는 어느 날 배가 고파서 옜(옛)날 하얀 강(광)목 자루를 오른쪽 어깨 메고 동내(네) 이 집 저 집 다니며 동냥을 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기억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동냥을 해오라고 어머니가 시켰을 때 어린 마음에도 용기가 나지 않아 이웃집 문밖을 오래 맴돌았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빈 자루로 돌아가면 모두 죽는다는 심정이었겠지요. 얻어온 좁쌀 한 주먹을 어머니가 가마솥에 넣고 물을 가득 부어 끓였습니다. 죽도 못 되는 것을 아껴 며칠을 두니 작은 덩어리가 졌습니다. 내 몫의 덩어리를 허기로 배가 꺾인 동생이 먹어버렸습니다. 배고프고 화가 나서 동생을 때렸습니다. 미안함에 지금도 뼈가 저립니다.
“이 소녀는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했)습니다. (글이 서툴러) 죄송합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워 10살에 친구 따라 처음 학교에 가봤습니다. 발뒤꿈치 들고 창문에 매달린 저에게 교장선생님이 ‘공부하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무상 교과서’를 내주며 학교에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책을 달달 외운 뒤 학기가 끝나면 반납했습니다. 한권밖에 없는 공책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해 구멍이 났습니다. 한창 클 나이엔 못 배우는 것보다 못 먹는 게 서럽다며 어머니가 설득했습니다. 부잣집 머슴이 되면 밥은 굶지 않는다며 등을 밀었습니다. 싫다며 버티다 두번째 무상 교과서를 반납하고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데리러 온 사람을 따라가 11살에 머슴이 됐습니다. 산골짜기에 있던 그 집은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만 있는 집에서 군대 간 아들 대신 소를 먹이고 밭일을 했습니다. 그 집을 시작으로 마을을 옮겨 다니며 5년을 일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소녀 16살 나이 12월 때 엄마는 세상을 뜨(떠)났다. 엄마를 업고 산에 갔(갖)다 뭇(묻)었다.”
의사가 위암 말기를 진단하고 일주일도 안 된 날이었습니다. 쉰도 못 채운 어머니의 이른 죽음을 저는 굶주림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명태처럼 바짝 마른 주검을 지게에 싣고 일어섰을 때 어깨가 빈 것처럼 가벼웠습니다. 눈 내리는 산길을 어머니를 지고 올라갔습니다. 아무리 파도 삽이 들어가지 않던 돌밭에 어머니는 있습니다. 사는 게 힘겨워 어머니에게 가지 못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무덤을 찾아갔을 땐 우거진 나무들이 길을 지운 뒤였습니다. 봉분을 없앤 숲은 멧돼지 출몰을 경고했습니다. 해 저문 산속에서 어머니를 부르며 헤매다 겁이 나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와서 밤과 낮 구분 없이 울다 보니 동내(네) 사람이 와서 이제 그만 울어라 했다. 그리고 엄마는 이제 오지 못할 길을 갔서(으)니 이제는 너 혼자 살 길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먹을 것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형·누나·동생이 살길 찾아 떠나고 셋째인 박수일만 어머니와 생활)에서 사흘을 울었을 때 무서운 기가 느껴졌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과 정을 떼려고 무서움을 보낸다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무서움이 오니까 더는 집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부잣집을 찾아갔다. 소도 먹여 주고 나무도 해줄 테니 밥 좀 시큰(실컷) 먹게 해달라고 했다.”
돈은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1년에 쌀 한 가마니 주면 고마운 집이었습니다. 동네 머슴들과는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밤에 모여 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고픔 때문에 머슴 살던 집들 주소입니다. ①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정씨 집 1년 ② 울진군 평해읍 직산리 박씨 집 1년 ③ 평해읍 평해리 송씨 집 1년 ④ 평해읍 평해리 이씨 집 1년 ⑤ 평해읍 삼달리 남씨 집 2년 ⑥ 평해읍 학곡리 (여기는 손씨들만 사는 마을입니다) 손○○ 집에서 1년 살고, 손△△ 집에서 1년 살고, 손□□ 집에서 2년 살고.”
그렇게 24살이 됐습니다. 머슴으로만 살다 죽을 순 없었습니다. 경북 포항의 고종사촌 형 집에 얹혀 지내며 형수가 소개해준 기름회사의 배달 기사 조수가 됐습니다. 계를 굴려 목돈을 만들어준다던 형수가 제 월급을 대신 받아 모두 써버렸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습니다. 단 한달치 급여도 못 받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화물차 조수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39살에 14t짜리 제 트럭을 샀습니다. 전국으로 화물을 나르며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화물차 기사는 정년이 없는데도 지입하던 업체에서 퇴직을 당했습니다. 1년 쉬고 경비원으로 처음 일(2018년)한 곳이 ‘우리 ㄷ아파트’였습니다.
“○○○동 입주민 여러분 열심희(히) 잘한다고, 그 아저씨 착하다며 오래오래 근무하라 했는대(데), 부당해고를 당하고 보니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합니다. 이미 그 동대표(이자 입주자대표회의) 감사님은 2024년 초부터 (저를) 짜(자)른다는 계획을 세워 둔 거지요.”
배고픔을 잘 아는 제가 배고픈 고양이를 외면할 순 없었습니다. 사료를 준비해주며 길고양이 밥을 챙겨 달라고 부탁하는 아파트 청년들의 요청에 응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길고양이 밥을 줬다는 이유로 우리 동도 아닌 옆 동 대표가 관리사무소에 저의 해고를 그토록 집요하게 요구할 줄은 몰랐습니다. 결국 고양이(☞20회 ‘네 운명 다할 때까지’)도 저도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억울한 것은 (저의 해고와 재계약을 연계한 입대의의 압박에) 경비업체가 저를 짜(자)르기 위해 어떻게 핸(했)냐고요. 있지도 아니한 거짓말 서류를 꾸며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했지만 노동위원회에서는 그(거)짓을 알고 부당해고란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저의 해고를 막으려는 사장님(주민)이 지노위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권했을 때 ‘혹시 내 일이 소문 나서 아파트 집값이라도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어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해고당한 제가 해고한 아파트의 집값을 진심으로 걱정했습니다. 부당해고 판정(2025년 3월) 뒤 입대의 회장님에게 전화해 복귀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말이 돌아왔습니다. 당신 때문에 집값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고요. 지노위의 원직 복직 주문에도 ‘우리 아파트’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경비회사는 저를 근무환경이 훨씬 열악한 ㅎ아파트로 보냈습니다.
“저를 내보내기 위해서 별수단과 방법을 다 썼지만요.”
경비회사 간부가 ㅎ아파트까지 찾아와 ‘다시는 ㄷ아파트에서 근무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강요했을 때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ㄷ아파트는 화물차를 정리하고 경비원으로 일한 첫 직장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ㄷ아파트를 ‘우리 아파트’라고 부릅니다. 언제라도 복귀하고 싶은 정든 곳입니다. 경비원은 입주민이 오가는 길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그분들의 필요를 살펴 불편을 줄이는 사람입니다.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함부로 그 일과 생계를 빼앗겨도 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일을 못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친절”(회사가 지노위에 제출한 해고 사유 중 하나)이라고 억지 꼬투리 잡을 만큼 열심히 일하면서도 주민들에게 잘 보이려 한 적은 없었습니다. 성실은 평생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제 삶의 태도였습니다.
“저 박수일은 다시 ㄷ아파트 가서 일하게 된다면 주민 한분 한분에게 체(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머슴살이하던 동네에서 갓 쓴 어른이 못 배운 아이들을 마을회관에 모아 글을 가르쳤습니다. 일 끝난 저녁부터 밤늦도록 공부하며 익힌 한글로 이 글을 썼습니다. 제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서 뭐하나 싶었는데 볼펜을 잡자마자 울컥했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풀어놨지만 그리 시원하진 않습니다.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하고 살아온 제가 바보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잘못된 길로 새진 않았구나, 어려운 환경에 지지 않았구나, 나 부끄럽지 않게 나이 먹었구나, 이 생각을 보답 아닌 보답처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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