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잡지가 질문의 시공간이 된다면
2026.06.10 00:36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에서
오래된 것과 지금의 삶이
책 안에서 잠시 연결된다면
오래된 것과 지금의 삶이
책 안에서 잠시 연결된다면
일본 사가현 아리타초의 도자기 마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지만 곧 해가 떠오를 것이고, 나는 종일 이곳저곳을 다니며 취재를 하고 자료 사진을 찍을 것이다. 어제는 폭우 때문에 반나절을 날렸고, 오늘 오후에는 규슈 도자기 박물관 학예사와 인터뷰 약속이 있어 마음이 급하다. 저녁이 되기 전에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끌려온 도공들의 무덤과 거대한 도자기 가마까지 둘러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조금 얄궂기도 하다. 사실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책에 빠진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작은 방이나 다락에 틀어박혀서 읽고 또 읽는 것이 나의 놀이였다. 대학 시절에도 학과에서 답사를 가자고 하면 갖은 핑계를 대며 빠졌다. 사실 게을러서였겠지만, 서재나 도서관에도 충분히 여행의 장소가 있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잡아끌고 이곳저곳을 다니게 한 것은 잡지다. 지역과 전통에 대한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나는 여러 기이한 모습을 보았다. 달이 휘영청 뜬 밤이면 고향에 대한 발작적인 그리움으로 거리에 나와 사자춤을 추던 북쪽의 사내들을 보았고, 피난길에 나선 왕조의 문서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들고 산으로 도망쳐 교대로 불침번을 서던 늙은 선비와 시골 관리를 보았다. 팽목항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바닷물에 뛰어드는 제주의 할망도 보았다. 그 풍경들은 자못 서늘했으며, 때로는 아름답거나 오싹했다.
학술서를 만드는 것으로 출판 일을 시작했던 내게 잡지는 조금 이상한 존재로 느껴진다. 단순히 판형이 크고 편집이 화려해서는 아니다. 작은 잡지와 무거운 글로 빼곡하게 채워진 잡지들도 많다. 목소리가 크고 야성적이라고 할까. 전통적으로 잡지는 광고를 실어 나르는 기계의 역할에서부터 세상과 불화하는 지식인의 무기가 되는 일까지 감당해 온 매체다. 분명히 그 에너지는 여느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이 잡지가 특정한 시공간을 잠시 점유하다가 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이사를 갈 때 끈으로 묶어서 버리는 것이 잡지 아닌가. 이것은 술을 넣어둔 찬장에 자물쇠를 채우는 중독자의 심정과 비슷하다. 잡지는 그것을 만드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일종의 중독 상태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다. 땀과 눈물 같은 거로는 부족해, “피를 줘” 하는 식의 말을 잡지는 꽤 뻔뻔하게 건네 온다. 아름답고 멋진 잡지일수록 좀처럼 사정을 봐 주지 않는다. 그들의 말에 홀려 자신을 더 갈아 넣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 만들고 있는 잡지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자주 떠올리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잘되지는 않는다. 김해와 낙동강 일대의 도자기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다 보니 일본의 서쪽 끝 아리타까지 오지 않았는가. 조선인 도공들의 슬픔을 되새기거나 그들이 남긴 유산을 그저 상찬하려는 이유는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몸으로 얻으려는 것이다. 간결한 형태의 조선 도자기가 어떻게 일본의 채색 도자기 문화로 이어지고 변화하는지, 이곳의 도자기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한 유럽 수출과 파리 만국박람회 등을 거치면서 어떤 충격을 받는지, 그리고 장식과 채색을 걷어내고 다시 간결한 형태로 회귀하는 현대 아리타 장인들은 어디를 향하는지 하는 것들이다.
나는 잡지가 질문의 시공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있어 그리움이란 왜 이리도 강렬한가, 타인을 위해 차가운 바닷물에 기꺼이 뛰어드는 이들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가, 무언가를 더 잘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우리를 어디까지 이끄는가 하는 것들. 답 없는 질문을 거듭 던지고 그것에 대결하는 일을 통해서 오래된 것과 지금의 삶이 책 안에서 잠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들을 마음 한구석에 담은 채로 아침을 기다린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수출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