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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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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 부품에서 전략 자산 된 메모리… AI 시대 2막의 새로운 주역[최중혁의 월가를 흔드는 기업들]

2026.06.09 23:07

48년 버틴 메모리 빅3, 마이크론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

《인공지능(AI) 시대에는 기억하는 자가 승리한다.”
최근 2년간 월가의 AI 투자 공식은 단순했다. 엔비디아에 투자하면 됐다. 생성형 AI의 학습과 추론에 필수적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절대 강자가 엔비디아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자연스럽게 AI의 ‘두뇌’를 만드는 기업에 열광했다. 하지만 월가의 시선이 조금씩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AI가 똑똑해질수록 중요한 것은 연산 능력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천억, 수조 개의 매개변수를 가진 AI 모델은 방대한 데이터를 읽고, 저장한 뒤 다시 불러와야 한다. 아무리 빠른 두뇌가 있어도 기억장치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AI는 제 성능을 낼 수 없다. 월가에서 “AI의 진짜 병목은 GPU가 아니라 메모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 변화의 중심에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있다. 마이크론 주가는 최근 1년 사이 약 10배 가까이 뛰었다. 지난달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차례로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510조 원) 문턱을 넘으며 메모리 ‘빅3’의 합산 시총이 3조 달러를 돌파했다. 어제까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메모리가 하루아침에 AI 시대의 주연으로 무대 한가운데에 선 것이다. 비록 최근 브로드컴 실적 발표 이후 AI 반도체 전반의 차익 실현과 밸류에이션 조정 영향으로 시가총액이 1조 달러 이하로 내려왔지만, 8일 기준 ‘1조 클럽’을 재탈환했다.

버티던 회사, AI 시대 날개 달다

마이크론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1978년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서 작은 반도체 설계 컨설팅 회사로 시작했다. 보이시는 실리콘밸리와 거리가 멀었다. 첨단 반도체보다 감자 농장이 어울리는 도시였다. 실제로 마이크론 초기 성장에는 ‘감자왕’으로 불리던 아이다호 억만장자 J R 심플롯의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

1980, 90년대 메모리 시장은 피로 물든 전쟁터였다. 일본 기업들이 세계 D램 시장을 장악했고, 이후 한국 기업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미국의 수많은 메모리 회사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인텔조차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하고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했다. 마이크론은 미국에서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메모리 기업이었다.

처음에 살아남는 방식은 버티기에 가까웠다. 새 장비보다 중고 장비를 활용했고, 공장 투자도 신중히 했다. 기술적으로 무조건 앞서가기보다 수익성을 지킬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이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메모리 사업과 일본 엘피다 등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하지만 마이크론은 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뒤를 쫓는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AI 시대가 열리면서 그 평가는 뒤집히고 있다.

“메모리 값 우리가 정한다”

핵심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HB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GPU와 초고속으로 연결하는 메모리다. 일반 D램이 넓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라면, HBM은 여러 층으로 쌓인 고속 엘리베이터에 가깝다. 데이터가 짧은 거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오간다. 엔비디아의 AI GPU는 HBM 없이는 제 성능을 낼 수 없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는 고객이 쉽게 바꿀 수 있는 범용 부품에 가까웠다. 가격 협상력은 고객에게 있었다. 하지만 HBM은 다르다. GPU 설계 단계부터 함께 최적화돼야 한다. 단순히 D램을 많이 찍어 내는 문제가 아니라 고객과 함께 설계하고, 테스트한 뒤 인증까지 받아야 한다. 한번 채택되면 공급 계약도 장기화된다. 메모리가 범용 원자재에서 전략 부품으로 바뀐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수년 전 산자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를 만나 AI 시대 메모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마이크론은 엔비디아 로드맵에 맞춰 HBM 개발 속도를 높였다. 한때 신중한 투자 기조 탓에 HBM 경쟁에서 뒤처질 뻔했던 마이크론이 AI 메모리 핵심 공급망에 편입된 것이다.

월가 애널리스트들의 평가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AI 수요가 주도하는 메모리 부족 현상이 앞으로 2∼3년 더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JP모건도 AI 병목 현상을 주도하는 영역으로 HBM과 냉각, 네트워크 등을 꼽으며 메모리 업체들의 가격 결정력에 주목했다. 엔비디아가 GPU 병목을 장악하며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면, 다음 병목은 HBM과 전력, 냉각, 네트워크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이다.

마이크론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빅테크와 클라우드 기업들은 특정 국가와 기업에 의존하려 하지 않는다. HBM이 AI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 된 이상, 공급망 리스크는 곧 사업 리스크다. 마이크론은 미국에 본사를 둔 유일한 대형 메모리 제조사다. 지정학적 긴장이 커질수록 이 점은 더욱 전략적 가치가 된다.

구조 변화와 경기 회복의 만남

물론 모든 별이 영원히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리스크는 밸류에이션이다. 주가가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 최근 브로드컴의 실적 발표 이후 AI 반도체 업종 전반에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졌고, 마이크론 주가도 하루 만에 13% 넘게 급락했다. 단 하나의 경쟁사 가이던스가 시장 전체의 눈높이를 낮출 만큼, 지금 반도체 주식은 ‘완벽한 실행’을 전제로 가격이 매겨져 있다.

둘째, 메모리 산업의 사이클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은 AI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고 있지만, 높은 이익률은 결국 경쟁사의 투자 확대를 부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HBM 투자를 늘리고 있다. 2, 3년 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은 다시 흔들릴 수 있다. 호황기에 늘린 설비가 다음 불황기의 공급 과잉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메모리 산업의 오래된 딜레마다.

셋째, 엔비디아에 대한 높은 의존도다. HBM 시장의 최대 고객은 엔비디아다. 엔비디아의 GPU 로드맵에 채택되는지 여부가 공급사 실적을 좌우한다. 마이크론이 차세대 제품 인증에서 뒤처지거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한다면 성장세는 둔화될 수 있다.

반면 강세론자들은 “이번 사이클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메모리가 더 이상 범용품처럼 취급되지 않을뿐더러 다년 계약과 지속적인 공급 제약, 첨단 패키징 병목이 가격 결정력을 지속적으로 떠받칠 것이라는 논리다. 과거 사이클이 ‘가격 폭락→적자→투자 축소’의 자기 파괴적 루프였다면, 이번에는 AI라는 구조적 수요가 일반적 경기 회복 위에 한 겹 더 얹혀 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구조적 변화 위에 올라탄 경기 순환적 상승세’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은 계속될까

AI 시대의 메모리는 더 이상 값싼 부품이 아니다. AI 성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월가는 오랫동안 “메모리는 사이클이고, GPU는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AI가 거대해질수록 연산과 기억은 분리될 수 없다. 더 빠른 두뇌는 더 넓고 빠른 기억을 요구한다.

마이크론의 이야기는 결국 재평가의 드라마다. 보이시의 작은 반도체 회사는 40여 년 동안 혹독한 메모리 사이클을 견뎌냈다. 일본 반도체의 공세와 한국 기업의 부상, PC와 스마트폰 사이클, 중국 규제와 공급 과잉을 모두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 AI 시대에 미국의 마지막 메모리 기업은 월가의 가장 뜨거운 이름 중 하나가 됐다.

AI의 첫 번째 장이 엔비디아의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장에는 마이크론의 이름이 더 크게 쓰일지 모른다. 마이크론이 정말 엔비디아처럼 평가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화려한 사이클의 정점에서 춤추고 있는지는 아직 결론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다. 이제 누구도 메모리를 ‘지루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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