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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젠슨 황 방한과 ‘대체불가 대한민국’

2026.06.09 18:45

정영현 테크성장부장
엔비디아 찾는 韓, AI 공급망 핵심 부상
HBM넘어 로봇·車·플랫폼 강점 확인
엔비디아와 개별 협업만으론 반쪽 성과
AI 시대 표준·조건 제시할 역량 키워야
이달 2일 대만 컴퓨텍스 SK하이닉스 부스를 방문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7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E) 웨이퍼에 사인과 함께 문장 하나를 남겼다. ‘Please Make More(제발 더 만들어 달라).’ 세계 인공지능(AI) 가속기와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사실상 표준을 쥔 기업 수장이 한국 기업에 전한 말은 주문이 아니라 간청에 가까웠다.

사흘 뒤 황 CEO는 서울에 왔다. 나흘 밤 닷새 동안 머물렀다. 일정 내내 SK·삼성전자·현대차·LG·네이버·두산 등 대기업 총수와 경영진, 게임사와 스타트업 대표들을 잇따라 만났다. 엔비디아에 절실히 필요한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자동차·로봇·게임·플랫폼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리는 ‘피지컬 AI’의 재료가 한 나라 안에 거의 다 모여 있는 까닭이다.

엔비디아의 존재감은 황 CEO 개인의 화제성과 맞물려 방한 내내 더 커졌다. PC방 경품 행사와 예능 출연, 야구 시구, 삼겹살과 소맥이 기업 협력 의제보다 더 주목받기도 했다. 엔비디아가 게임 생태계에서 성장했고 한국이 반도체와 게임 문화를 함께 가진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낯선 조합은 아니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그가 한국 기업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보다 인간 젠슨 황이 더 부각된 게 우리에게 과연 바람직한 일이었나. 황 CEO를 탓할 일은 아니다. 시장과 파트너, 개발자와 소비자를 한꺼번에 끌어안는 것은 기업 수장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전략이다. 대중 친화력이 높은 일련의 이벤트들은 엔비디아 전략이 얼마나 치밀한지 보여줄 따름이다.

대응 전략을 되돌아봐야 할 쪽은 한국 기업이다. ‘더 만들어 달라’에 ‘더 만들겠다’로 답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 옳고 빠르다. 다만 그런 합리적 선택이 개별 기업 단위로 제각각 쌓인다고 해서 곧 하나의 산업 질서가 되지는 않는다. 기업이 저마다 엔비디아의 협력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데서 멈추면 한국의 기술과 데이터는 엔비디아의 플랫폼을 따라 흩어진다. 강한 기업을 여럿 가진 것과 강한 산업을 가진 것은 다르다.

물론 황 CEO가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서울 연구개발(R&D)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차세대 가속기 우선공급을 둘러싼 협의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엔비디아 생태계를 한국에 더 깊숙이 들이는 일에 가깝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내건 ‘대체불가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이 산업의 질문으로 바뀐다.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좋은 기술을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다. 그 기술로 가격과 표준, 조건을 함께 제시하는 나라다. 필요한 나라는 협력 대상이 되고, 대체 불가능한 나라는 협력 조건을 먼저 내민다.

그런 맥락에서 황 CEO의 방한 동선은 한국이 ‘필요한 나라’임을 확인시켰다. 동시에 최선단 HBM의 공급 우위만으로는 AI 산업 전반의 조건을 제시하는 ‘대체 불가한 나라’가 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드러냈다.

엔비디아 손을 놓고 폐쇄적인 K생태계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바깥과 이어지더라도 기술의 과실과 산업 데이터, 인재와 운영 경험이 최대한 국내에 축적되게 해야 한다. 메모리와 클라우드, 모빌리티와 로봇 등 한국 기업 저마다의 역량이 엔비디아의 여러 성과 목록으로 흩어지는 대신 서로의 강점을 잇대어 ‘한 판’으로 설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역량의 부재가 아니라 연결의 부재가 문제다. 한국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클라우드와 통신망, 자동차와 로봇, 전력과 제조 현장이 모두 있지만 이를 하나의 AI 인프라 운영 체계로 묶는 공통 설계가 약하다. 한국 산업의 숙제다. 정부도 기업들이 함께여서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AI 시대 기업 성장의 핵심인 전력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산업 데이터 활용 규칙, 핵심 인재 유출 방어, 그리고 기업들이 함께 쓸 수 있는 AI 컴퓨팅 기반 마련은 정부가 설계하고 보강해야 할 영역이다.

젠슨 황은 “제발 더 만들어 달라”고 했다. 최선단 HBM 공급의 핵심 축을 쥔 한국은 엔비디아의 플랫폼 권력을 상대로 협력 조건을 협상할 강력한 무기 하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와 클라우드, 모빌리티와 로봇, 데이터센터와 전력이 저마다 따로 도는 한 그 무기만으로 ‘가장 성실한 공급자’라는 한계를 넘을 수 없다. 한국 산업의 흩어진 자산을 하나의 AI 산업 질서로 엮어 가격과 표준, 조건을 함께 제시할 때 ‘대체불가 대한민국’은 비로소 구호가 아니라 산업의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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