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안의 외계 행성, 망기스타우를 아시나요 [김새봄의 미식 스프링노트]
2026.06.09 17:09
카자흐스탄을 다녀온 뒤, 이틀을 꼬박 앓듯 울었다. 평생 상상조차 못 한, 겪어본 적 없는 경이로움이 안겨준 거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신의 존재를 인지하며 살아왔지만, 인간의 흔적이 온 사방에 단 한 줌도 보이지 않는, 눈앞에 육중하게 또 신비롭게 버티고 선 대자연은 신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자연과 나 사이에 실오라기 하나 두지 않고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들. 살갗을 한올한올 파고드는 거친 바람과 텐트 안에 누우면 정면으로 후드러지게 쏟아지는 빗줄기, 발밑에서 부서지는 수만년전 적갈색 흙을 온몸으로 맞으면 신의 압도적인 권능 앞에서 한없이 작고 겸허한 인간의 존재를 뼈저리게 깨달으며 흐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알마티를 통해 카자흐스탄을 만난다.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과 에메랄드빛 호수는 이 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움이다. 유럽의 산악 국가를 떠올리게 하는 자연을 비교적 합리적인 비용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 직항 노선 확대와 함께 여행 정보가 늘어난 점 등은 최근 몇 년 사이 카자흐스탄이 여행지로 주목받기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카스피해를 향해 시선을 옮기는 순간, 카자흐스탄은 또 다른 풍경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무대가 바로 서부 망기스타우다.
망기스타우주의 주도인 악타우는 카스피해 연안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바닷가와 사막 기후 특유의 거친 상호작용은 곳곳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짙푸른 카스피해와 눈부신 백악 절벽, 외계 행성 같은 붉은 사막이 공존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살아있는 지형 박물관'이다.
수백 킬로미터가 끝없이 펼쳐진, 그러나 매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들이미는 변화무쌍한 '본 투 비(Born to be)' 지구의 민낯. 대충 셔터를 눌러도 비현실적인 인생 사진이 쏟아지는 광활함 속에서도, 그 벅찬 감동을 작은 프레임에 온전히 담아낼 수 없어 렌즈를 들이미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는 아우라다. ‘아름답다’보다는 ‘압도된다’는 묘사가 훨씬 어울리는 곳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움의 '넥스트 레벨(Next Level)', 그 미지의 영역 어딘가에 망기스타우가 있다. 인생에 권태기나 이른바 '현타'가 찾아온 이들에게 누구보다 이곳으로의 여행을 주저 없이 강력히 권하고 싶다.① 망기스타우의 지질 명소 토리시(Torysh)
② 코칼라(Kokala)
③ 고대 바다의 퇴적층인 아이락티(Airakty-Shomanai Valley)
④ 셰르칼라 산
⑤ 투즈바이르(Tuzbair) 소금평원
수천만 년 전 이곳을 뒤덮고 있던 고대 바다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하얗게 굳은 소금 평원으로 남았다. 바닷물이 수없이 밀려들고 증발하기를 반복하며 남긴 염분은 긴 세월 동안 대지에 켜켜이 쌓였고, 융기와 침식이 더해지며 지금의 끝없는 백색 평원을 완성했다. 평원 위를 쌩쌩 달려 소금언덕에 도착하면 마치 지구가 아닌 제3의 행성에 발을 디딘 듯한 착각이 든다. 구름이라도 낀 날에는 하늘끝부터 땅끝까지 경계없는 하얀 스튜디오가 된다.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풍경은 가장 지구다운 이야기, 즉 바다가 물러가고 대륙이 솟아오르며 시간이 쌓인 결과물이다. 투즈바이르는 풍경이라기보다 지구가 남긴 오래된 기억에 가깝다.
⑥ 보즈지라(Bozzhyra)로 가는 길
⑦이 비현실적인 지층의 마법은 보즈지라(Bozzhyra)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풍경이 펼쳐지는 범위와 지형의 압도감이 워낙 크기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넓이 대비로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려있는 스폿이다.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을 기록하기 위해 하루종일 전 세계의 풍경 사진가와 드론 촬영가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2시간 남짓 충분히 보즈지라를 즐긴 이후에도, 노을이 밤으로 바뀌고 칠흑같이 어두워지도록 매니아들은 드론 삼매경에서 헤어나올줄을 몰랐다.
⑧'티라미수 협곡'이라는 달콤한 애칭이 붙은 키질쿱(Kyzylkup)
산화된 붉은 철분 층과 새하얀 석회암층이 끝없이 겹쳐져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일정한 간격으로 차곡차곡 얹어진 퇴적층은 영락없이 티라미수 케이크를 닮았다.
멀리서 볼땐 달콤한 케이크 같지만, 가까이 가면 그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빗물의 흔적뿐인 흙더미다. 곳곳이 쩍쩍 갈라져 발이 푹푹 빠지는데 바람이 일렁일때마다 생각치 못한 짙은 풀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이 척박한 틈새를 뚫고 꿋꿋이 살아남은 야생 허브들이다. 척박한 땅 속에서 오히려 강렬한 향기를 뽐내며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하는 모습은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낮은 언덕뿐인 키질쿱 사이는 유독 바람이 거세다. 나무도, 건물도, 인간의 흔적도 없는 공간에서 바람은 아무런 방해 없이 대지를 가로지르며 수십km 이상 방해없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협곡과 언덕을 타고 넘고 통과하면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낮에는 시야가 일렁일 만큼 햇살이 내리쬐다가도, 붉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한기가 불쑥 몰려온다.
거센 바람을 뚫고 빠르게 캠프를 차리고 저녁을 먹은 뒤 취침 준비를 한다. 나무가 없으니 벌레도 거의 없다. 덕분에 바람은 매섭게 불지언정, 그 어떤 곳에서의 캠핑보다도 쾌적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을 넘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사랑받는 '샤슬릭(Shashlik)'은 유목민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소울푸드(soul food)다. 두툼하게 썰어낸 고기를 긴 쇠꼬치에 꿰어 뜨거운 숯불 위에서 직화로 구워내는데, 숯불로 뚝뚝 떨어지는 기름이 피워내는 짙은 연기가 고기에 깊게 스며든다. 수만평 너른 초원에서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게 자란 가축들이기에 구웠을 때 입안 가득 팡팡 터지는 원초적인 불향과 육즙은 그 어떤 파인다이닝도 흉내낼 수 없다.
로컬 슈퍼마켓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앙아시아식 오븐 구이 만두 '삼사(Samsa)' 역시 마찬가지다. 바삭하게 구워진 황금빛 페이스트리 속에 고소한 고기와 감자가 향신료와 어우러져, 광활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온종일 대지를 누빈 여행자들에게 값싸고 편하지만 든든한 위로가 돼준다.
그 비결은 유목 국가 특유의 수준 높은 유제품 품질에 있다. 수천 년간 드넓은 초원에서 가축과 호흡해 온 이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치즈의 수준은 우리의 평균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고도 남는다. 갓 구운 피자를 한 조각 들어 올리면, 도우가 듬뿍 얹힌 치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폭포수, 혹은 용암처럼 무겁게 흘러내린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가공 질감이 아닌, 자연스러운 치즈의 탄성과 입안을 꽉 채우는 녹진한 우유 풍미는 여행자의 혀끝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지구의 태초를 간직한 겹겹의 대자연과 서늘한 빙하호, 그리고 오랜 시간 거친 바람 속에서 축적된 유목민의 짙은 맛까지. 카자흐스탄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중앙아시아의 모든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완벽한 무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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