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에 독립운동가가 된 신문배달원 [김종성의 '히, 스토리']
2026.06.09 13:41
| ▲ 제100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 포스터 |
| ⓒ 국가보훈부 |
올해 6월 10일은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국가보훈부는 이 만세 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13명에게 특별 포상을 하기로 했다고 8일 자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이번 특별 포상은 3월 1일 및 8월 15일과 더불어 순국선열의 날(을사늑약 강제일)인 11월 17일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하던 기존 관행을 벗어난다. 3·1운동 및 광주학생독립운동(1929)과 함께 한국인들의 자주독립 열망을 가장 열렬히 분출한 1926년의 이 사건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2명), 건국포장(2명), 대통령표창(9명)을 받는 특별포상 대상자 13명 중의 한 명인 김낙환(金洛煥)은 일제강점기의 경상북도경찰부가 작성한 <고등경찰요사(要史)>에 따르면 신문 배달을 하는 청년이었다. 1903년 생이고 본적이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인 그의 직업은 시대일보사 경성판매소 배달원이었다.
이 신문사는 3·1운동 독립선언서 작성자인 최남선이 친일 전향 4년 전인 1924년에 창간한 언론사다. 오늘날의 서울 종각역 및 조계사 인근인 견지동에 거주하면서 이 신문사의 배달 일을 하던 김낙환은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시대배달동무회 집행위원도 겸했다.
총 들고 감시하는 일제 병력 앞에서 격문 배포
당시에는 배달원 단체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6·10만세운동 2개월 전에 발행된 1926년 4월 11일 자 <조선일보>는 김낙환의 주거지(견지동 99번지) 인근인 견지동 97번지에 위치한 시대일보사 경성판매소의 배달원들이 시대배달동무회 준비회를 개최한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해 2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전조선신문배달조합총동맹 창립회가 개최된 사실을 자세히 전했다.
이처럼 신문배달원 단체가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배달동무회 집행위원이라는 직함도 영향력이 있었다. 김낙환은 이 영향력을 순종황제 장례에 맞춰 계획된 6·10만세운동을 위해 활용했다. 그는 사회주의 학생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이 운동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는 7년 전 3·1운동의 '악몽'을 막고자 순종의 상여가 지나갈 서울 시내 곳곳에 경찰과 군대 병력을 대대적으로 배치했다. 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는 "5천 명의 일제 군대와 2천 명이 넘는 정·사복 경찰의 경계 속에서" 장례 행렬이 행진했다고 알려준다.
그처럼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6월 10일 오전 8시 40분부터 청년·학생들의 가두투쟁이 벌어졌다. 그 대열에 김낙환이 있었다. 역사적인 이 현장에서 그는 시대일보사가 아닌 한민족에 고용된 배달원이었다. 이때 그는 항일 격문 배포를 담당했다. 그가 있었던 위치는 4년 뒤 동대문부인병원으로 개칭될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앞이었다. 위 <독립운동사>는 이렇게 기술한다.
"오후 1시 15분경 동대문부인병원 앞에서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 외 청년 2명이 '조선독립 만세' 고창과 격문을 살포하였다."
김낙환이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한 장씩 나눠준 격문에는 그가 일제 치하에서 더 이상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문구들이 있었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이번에 특별포상이 함께 추서되는 연희전문학교 학생 이병립(李炳立, 1904~?)이 작성한 격문에는 "이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 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피 흘림을 불사하고 원수 일본을 쫓아내자는 항일 격문이었다.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 원수이기에 피를 흘려 맞서 싸우자고 외치는 호소문이었다.
일본을 원수로 지칭하는 이 선전물을 일본 군경이 쫙 깔린 상태에서 한 장씩 배포했다. 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권: 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김낙환에게 할당된 격문은 약 3백 매였다. 총을 들고 감시하는 일제 병력 앞에서 그 많은 격문을 갖고 배포에 나섰으니, 그를 포함한 시위대가 얼마나 대담했는지를 절감할 수 있다.
일본을 대놓고 원수로 대한 항일투사
김낙환은 이병립 등의 제안을 받고 이 운동에 가담했다. 그런데 그의 역할은 가담자 그 이상이었다. 그는 격문 배포뿐 아니라 그 이전의 인쇄 단계에서도 결정적 한 방을 했다. 일제 경찰은 그의 역할을 <고등경찰요사>에 이렇게 적었다.
"박두종·이병립 등은 지인인 김낙환에게 사정을 밝히고 인쇄기계의 주선을 부탁하였다. 김낙환은 이를 승낙하고 이전부터 절친인 동지 장규정(張奎晶)이 명함 인쇄기를 소지하고 있으므로 사정을 밝히고 이를 제공토록 했다."
김낙환보다 두 살 적은 장규정은 지금의 청와대 인근인 청운동이 본적지였고 6·10 시기에도 이 지역에 거주했다. 그 역시 김낙환처럼 배달원이었다. 그는 <조선일보>를 배달했다.
김낙환은 장규정이 갖고 있는 명함 인쇄기를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런 뒤 6월 10일 당일에 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배포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김낙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보훈부 보도자료는 말한다. 6·10 만세운동 6일 뒤에 <동아일보>는 그가 경성제국대학·연희전문학교·중동학교·중앙기독청년회학관 학생들과 함께 검거된 일을 보도하면서 그를 포함한 47명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고 전했다.
김낙환은 일본을 대놓고 원수로 대한 항일투사였다. 그는 이 기조를 그 후로도 이어갔다. 풀려난 뒤에도 그의 항일운동은 계속됐다.
보훈부 보도자료에 소개된 1928년 10월 27일 자 경기도경찰부 고등경찰과 보고서인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사건 검거의 건'에 따르면, 김낙환은 이 공산주의 그룹의 분과인 '노동 야체이카' 내의 책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운동은 소작쟁의·노동쟁의·공산주의·아나키즘이었다. 김낙환은 그중 두 가지를 겸하는 항일투사였다.
6·10만세운동은 학생·종교계·공산주의진영이 주도한 운동이다. 신문 배달원인 김낙환은 이 운동에 뛰어들어 순종 장례 현장에서 용감한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게나마 그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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