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 재택임종 가능하게 한 돌봄 연대
2026.06.09 10:41
"욕창 문제, 그리고 돌봄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요구가 힘들었어요."
친지들이 함께 만들어낸 끈끈한 '돌봄 연대'와 방문의료, 그리고 가족으로서 겪은 이야기를 정영숙씨에게서 들어보았다.
돌봄 받는 사람, 돌보는 사람
영숙씨는 출판사 편집 직을 내려놓은 후, 현재는 동네에서 아이돌봄사로 일하고 있다. 시부모님은 2000년부터 함께 살며 살림을 도우셨다. 변화는 2021년 여름, 아버님이 87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시작되었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호소하셨다.
"눈이 안 보인다. 그저 실루엣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야."
어머니는 어린 시절 치료 시기를 놓쳐 청각장애를 안고 살았지만, 보청기에 의지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교단에 서기까지 한 분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경증 치매와 당뇨를 앓고 계셨으나, 침대에만 누워 지내는 와상(臥床)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었다. 영숙씨 부부의 돌봄을 받게 된 초기, 어머니는 오히려 홀가분하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돌봄 공백은 피할 수 없었다. 남편은 출근해야 했고, 영숙씨 역시 오전과 오후에 각각 두 시간씩 일을 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았다. 어머니는 TV를 보거나 당시 92세였던 오빠, 딸들, 제자들과 오랜 시간 통화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셨다.
식탁에 준비해 둔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스스로 말끔히 비우셨다. 비록 시력이 떨어져 외출은 어려웠지만, 집안을 걸어 다니며 운동하실 만큼 건강 상태도 비교적 양호했다. 영숙씨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 평온이 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영숙씨에게 새로운 요구를 했다.
"나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야. 그러니 네가 일 나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영숙씨의 머리는 하얘졌고, 순간 마음이 상했다. 기쁜 마음으로 돌봄을 이어오던 영숙씨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안방 침대에서 혼자 주무시던 어머니는 또 한 번 새로운 요구를 하셨다. 밤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가족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도록 무선 벨을 달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영숙씨는 돌봄을 받는 이의 자립과 돌보는 사람의 일상이 어느 정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가족이 모든 생활을 어머니의 요구에 맞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영숙씨를 포함한 가족 모두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지들이 이뤄낸 '돌봄연대'
돌봄은 어느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지속될 수 없다. 다행히 영숙씨 곁에는 든든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주된 돌봄은 영숙씨 부부와 요양보호사가 맡았고, 병원 동행과 운동은 어머니의 큰사위와 작은아들이 맡았다.
어머니의 작은딸은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막내딸은 어머니의 손발톱을 세심하게 정리하고 스마트폰을 점검하는 한편 간편식 주문을 맡았다. 여기에 매달 한 번씩 찾아와 기도해 주는 성당 신부님의 방문은 가족 모두에게 영적인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던 일상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섬망 증세가 있어 밤에 혼자 돌아다니셨어요. 새벽에도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넘어지셨는데, 저희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세탁실 앞에 주저앉아 계시더라고요. 그 상태로 몇 시간 동안 계셨는지 알 수 없었어요."
급히 병원으로 이송해 여러 검사를 진행한 결과,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러나 낙상의 심리적 충격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는 곧 와상 상태가 되고 말았다. 누워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배변을 돌보는 일은 돌봄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돌봄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고, 가족은 더 촘촘한 돌봄 체계를 마련했다. 영숙씨 부부와 요양보호사, 사위와 아들, 딸들이 돌아가며 배변 상태를 살피는 일을 분담했다. 가족 모두가 협조적으로 나서며 영숙씨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특히 큰사위는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해 평소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장모님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며 헌신하는 데 앞장섰다.
주변 친지들의 정서적 지지 역시 큰 힘이 되었다. 의사인 시외삼촌은 수고하는 영숙씨를 늘 살뜰히 챙겼다. 미국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시외삼촌도 꾸준히 영숙씨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시가 형제들의 오랜 화목함은 영숙씨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머니는 장기요양 5등급 판정을 받은 지 몇 달 만에 4등급으로 재조정됐다. 그때부터 방문목욕 서비스를 신청해 목욕 차량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와상 상태가 되면서 장기요양등급은 2등급으로 다시 조정됐고, 이후에는 방문목욕 차량을 이용할 수 없어 수건으로 몸을 닦아드리는 정도의 목욕만 가능했다.
든든했던 방문의료
"어머니가 누워 지내신 지 3주쯤 됐을 때, 기저귀를 갈다가 욕창을 발견했어요.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병원에 가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 방문간호를 알아봤어요. 하지만 방문간호를 이용하려면 먼저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요양보호센터를 통해 방문의료 제도와 의사 왕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러나 의사의 방문 일정이 이미 포화 상태라 진료 순서가 계속 뒤로 밀렸다. 하루가 급했던 영숙씨는 어머니의 욕창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 의사에게 전송했다. 이를 본 의사는 퇴근길에 기꺼이 짬을 내어 방문해주었다. 방문의료를 실천하는 김종희 선생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욕창 처치를 마친 뒤 사흘에 한 번씩 간호사가 방문해 집중 관리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한 다른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내과, 정형외과, 안과 등에서 처방받아 온 약물 목록을 살펴본 뒤 중복되거나 과다한 약을 통합하고 조절해주었다. 영숙씨는 매주 의사에게 상태를 보고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2주 전부터 더 이상 음식을 드시지 못하게 됐다. 김종희 선생은 "콧줄을 삽입해 영양을 공급할지, 어머님의 평소 뜻을 고려하여 가족과 상의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일반적인 병원 환경이었다면 '콧줄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방문의료진은 환자와 가족의 의사를 먼저 물었다. 당시 어머니는 몸짓으로 음식을 거부하셨고 말은 전혀 하지 못하셨다.
과거 부친의 임종기에 콧줄을 경험했던 아주버님이 나섰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장모님만큼은 그런 고통 없이 보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늘 솔선수범하던 그의 의견에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임종기가 가까워지자 김종희 선생은 산소포화도 수치 등 확인해야 할 징후를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의사의 조언은 가족에게 든든한 이정표가 되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심해지자 간호사가 방문해 영양수액을 놓아주었다. 간호사는 앞으로 관찰해야 할 사항을 설명한 뒤 어머니의 손가락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끼웠다.
2월 16일 아침, 어머니의 소변량이 현저히 줄고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혹시 손가락에 잘못 끼워진 것은 아닌가 싶어 영숙씨는 측정기를 뺐다가 다시 끼워보았지만, 산소포화도는 더 이상 측정되지 않았다. 놀란 마음에 어머니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보았을 때 이미 숨은 멎어 있었다.
영숙씨는 떨리는 손으로 김종희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더니 어머니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으세요. 돌아가신 것 같아요."
의사는 장례식장으로 연락할 것을 차분히 안내해주었다. 곧이어 남편과 큰사위가 들어와 필요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119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아주버님은 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동안 집에서 어머니를 간병해왔고 조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1년 반 전 아버님 역시 이 집에서 임종하셨고요."
경험상 경찰이 와서 여러 사항을 확인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해 덧붙인 말이었다.
구급대원이 어머니의 상태를 최종 확인하는 동안 신부님이 도착해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종부성사를 올렸다. 구급대와 형사들이 다녀간 뒤 운구 차량이 도착했다. 삶이 깃든 정든 집, 가족의 온기 속에서 어머니는 외롭지 않은 마지막 걸음을 내디디셨다.
| ▲ 어머니의 빈 침대 어머니 임종 후, 정영숙 씨는 슬픔 속에 어머니의 빈 침대를 사진으로 남겼다. |
| ⓒ 정영숙 |
살던 곳에서 늙고 죽는다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의 터널 속에서 영숙씨가 스스로를 지켜낸 비결은 소박했다. 소진되거나 스트레스가 차오를 때면 산책을 하거나 일기를 쓰며 감정을 추스르곤 했다. 이웃에 사는 인생 선배 김은희씨와 함께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목소리를 나눴고, 웰다잉 문화운동 연구팀에 합류해 존엄한 죽음에 대한 공부를 이어갔다.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영숙씨가 자처한 역할은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보험공단과 재가센터, 병원, 그리고 가족과 소통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을 제가 맡았던 셈이죠. 다행히 누구도 귀찮아하지 않고 기꺼이 협조해 준 덕분에 늘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어요. 나름의 성취감도 있었고요."
특히 은희씨와 산책하며 나눈 대화는 영숙씨에게 큰 의지가 됐다. 은희씨는 자신의 대학 선배가 초로기 치매(65세 미만에 발병하는 치매)로 투병할 때 임종의 순간까지 곁을 지키며 간병했던 경험이 있었다. 돌봄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두 사람이었기에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곤 했다.
영숙씨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취지에 깊이 동의하지만 아직 정식 등록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 기관을 찾아갈 겨를이 없었을 뿐, 기회가 닿는 대로 작성할 생각이다.
"저 역시 언젠가 찾아올 마지막 순간에는 내 집에서 눈을 감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하지만 저의 시어머니가 누리셨던 것처럼 돌봄 자원이 풍부한 환경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막연한 바람이긴 하지만 돌봄이 필요한 때가 오면 제 곁에도 은희씨 같은 이웃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어요."
영숙씨는 나이가 들어 뇌 기능이 저하되면 곁에 있는 이들이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며 공존하는 환경을 원한다. 그는 이를 '울타리 없는 요양원'이라고 불렀다. 이웃 간의 느슨한 연대로 만들어가는 지역사회 돌봄 커뮤니티. 이야말로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숙씨가 바라는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보이지 않는 환자를 위해, 병원 문을 나선 의사
우리가 꿈꾸는 지역사회 돌봄 커뮤니티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다. 그러나 이미 묵묵히 길을 내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 '함께걸음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마을의원에서 방문 진료를 실천하고 있는 김종희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정영숙씨의 돌봄 과정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준 의사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인터뷰를 청했다.
김종희 선생이 몸담고 있는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초창기부터 방문의료를 근간으로 삼아왔다. 그는 의사가 되기 전 오랜 시간 배낭여행을 했던 경험 덕분에 지역의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는 일에 익숙하다. 그가 현장으로 향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병원에서 진료하다 보면 얼마 전까지 주기적으로 찾아오시던 어르신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보행이 힘들어져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게 된 거죠. 결국 요양보호사나 가족이 와서 증상을 설명하고 약을 타가는 대리처방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방문 진료를 가보면 환자 상태에 맞지 않는 약을 드시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병원을 찾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환자들'을 마주하며 방문의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대의학은 모든 진료 결과를 검사 수치나 드러난 증상으로만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특히 방문 진료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에게는 고립된 일상을 돌보는 처방이 필요해요.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을 살펴보고 지역사회와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하는 거죠."
생명의 평등을 생각한다
| ▲ 방문의료 현장에서 고립된 환자의 자택을 찾아 진료하는 의사 김종희 씨. |
| ⓒ 김종희 |
김종희 선생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영숙씨 댁의 풍경은 '평온함과 정갈함'이었다. 와상환자의 경우, 냄새가 배기 쉬워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한데 집안 전체가 깨끗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평온한 돌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매일 하루를 시작하듯, 병상에 누워 있는 분들 역시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저마다의 하루를 시작해요. 흔히 '생명은 평등하다'라고 말하는데, 그 평등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요? 제한된 삶의 조건 속에서도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양치질을 돕고 대소변 위생 관리를 해드리는 것, 가려움증이나 피부 발진을 가라앉히고 수면과 통증을 조절하는 것, 나아가 흡인성 폐렴이 생기지 않도록 식사 자세를 교육하고 욕창 예방을 위해 엉덩이 피부를 살피는 것, 돌봄자에게 체위 변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까지, 이처럼 와상환자에게도 '일상의 존엄'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평등을 실천하는 의료라고 믿습니다."
방문의료를 실천하는 김종희 선생의 현재 삶을 있게 한 바탕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적절한 답이 아닐 수도 있다며 그가 꺼낸 이야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혼자 견디며 보냈던 시간인 것 같아요. 예전에 태국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 해외봉사단 활동을 마친 뒤 캄보디아에 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어요. 그때 온몸에 옴이 번지고 눈에는 화농성 결막염이 생겨 석 달 동안 지독하게 고생했어요.
온종일 몸을 긁다가 잠들고, 다시 긁으며 눈을 뜨는 나날이었지요. 눈에는 고름이 가득 차 있었고요. 그러다 우연히 프놈펜 거리에 있는 국제의료센터(International SOS)를 발견해 항생제 연고를 얻어 발랐어요.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결막염이 나았습니다. 물론 옴은 석 달 동안 저를 괴롭혔지만요."
피가 나도록 온종일 몸을 긁으며 고통을 견뎌야 했던 시간은, 고립된 환자의 삶에서 의료적 돌봄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것이 바로 그가 병원 문을 나서 지역사회 구석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이유다.
거대한 대화의 장
김종희 선생은 치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전환할 때라고 강조한다. 병원 중심의 '급성기 치료'에만 한정하지 말고,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의료의 역할을 찾아보자는 제언이다.
가정에서 노인을 돌볼 때 욕창, 고열, 호흡 변화 등의 증상이 나타나면 대개 가족은 당황해 응급실부터 찾기 마련이다. 이처럼 가족이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치의' 제도다. 환자를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본 주치의가 있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담할 수 있다. 이러한 신뢰 관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평온한 재택임종은 불가능에 가깝다.
"재택임종을 선택한다는 것이 치료를 포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에요. 집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정교한 '의료적 돌봄'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주치의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나가는 거예요. 욕창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나중에 썩는 냄새가 나고, 환자의 고통은 물론 돌보는 가족의 마음도 비참해져요. 따라서 욕창뿐 아니라 수많은 변수를 세심하게 살피는 의료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역사회 곳곳에서 '나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 모임과 공부 모임이 싹트고, 그것이 변화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평소 죽음과 돌봄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 두지 않으면, 막상 위급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분명한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재택임종을 간절히 원하더라도 이를 지탱할 돌봄 체계가 없으면 결국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환자와 가족의 의지를 오롯이 실현할 수 있는 돌봄 환경을 구축하려면 이제는 가족과 방문의료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해요. 지역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합니다."
영숙씨 가정의 돌봄 연대와 김종희 선생이 제안한 대화의 장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동네에서부터 발걸음을 내딛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각 지역에서 공동체 모임과 의식 변화가 움트고 있다. 재택임종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본문의 일부만 표시됩니다.
원문 보기 →댓글 (0)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시어머니의 다른 소식
모든 소식을 불러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