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라 불린 남자, 대통령 경호처의 토대를 깔다
2026.06.05 17:36
| ▲ 박상범 경호실장이 1994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선영 방문을 앞두고 헬기에서 내리고 있다. |
| ⓒ 대통령경호처 |
박상범의 경호실장 취임은 군사정권의 잿더미 위에서 되살아난 불사조와도 같은 사건으로, 한국 대통령 경호제도가 '충성의 문민화'로 전환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상징한다. 1993년 2월 25일,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박상범에게 수여한 경호실장 임명장은 단순한 인사조치를 넘어선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전 정권에서 이어지던 경직된 의전과 권위적 분위기 대신, 비교적 절제되고 유연한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임명식은 '문민정부'의 출범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그 이면에는 단순한 형식 변화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는 권력의 정당성을 군사적 위계와 개인적 충성에 의존해 온 과거 체제를 넘어, 헌법 질서와 시민적 가치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를 천명하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인사의 성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박상범은 해병대 예비역 대위 출신으로, 1970년 두 번째 준공개채용을 통해 선발된 전문 경호요원이었다. 이는 군 내부 인맥이나 정치적 연줄이 아닌 제도적 절차를 통해 경호 분야에 입문한 사례로, 이전 경호실장들의 경로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역대 경호실장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거나 하나회 등 군 권력 핵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은 경호 조직을 '대통령 개인에 대한 군사적 충성 집단'으로 만들 필요성에 있었다. 박상범의 임명은 과거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으로, 경호 조직을 전문성과 제도에 기반한 공적 조직으로 재편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인사였다.
더욱이 그의 개인사는 이 같은 제도적 전환에 상징적 깊이를 더한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발사한 총탄 네 발을 맞고도 생존한 경험은 그에게 '불사조'라는 별칭을 남겼다. 죽음의 문턱을 세 차례 넘나든 그의 생존 서사는 단순한 개인적 극복담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국가 시스템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군사정권 하에서 경호는 권력 유지의 도구였고, 충성은 특정 개인을 향한 절대적 복종의 형태로 요구되었다. 박상범의 등장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충성의 대상을 개인이 아닌 헌법과 제도로 재정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취임은 결국 한 인물의 성공 서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권력 구조가 '군사적 충성'에서 '문민적 충성'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의 압축된 표상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근무하던 경호관 중 유일한 생존자
1979년 10월 26일,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늦은 밤의 궁정동 청와대 안가. 공기 중에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는 순간, 경호 체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경호관들은 사건의 중심에 집결해 있지 못했다. 해당 공간이 중앙정보부 관할 안가였던 탓에, 이들은 외곽 경계 임무를 수행하거나 주방과 휴게실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총성과 동시에 발생한 정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경호관들에게는 총기를 꺼내 대응 사격을 하기 위한 극히 짧은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약 0.725초로 계산되는 대응 반응 시간은 그날 밤 철저히 봉쇄되었다.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박상범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발사한 총탄 네 발을 맞고 관통상을 입은 채 뒤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그는 피웅덩이 속에 방치된 채 약 10시간을 버텨야 했고, 이후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는 치밀한 대응의 결과라기보다 우연과 공백이 겹쳐 만들어낸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현장에서 근무하던 경호관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현장의 다른 경호관들은 확인 사살로 목숨을 잃었으나, 그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추가 사격을 피했다. 그 우연과 공백은 훗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10·26 사건이 지닌 미해결의 단면이자 동시에 박상범의 생존을 더욱 상징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국군수도통합병원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은 박상범은 곧바로 깊은 자책에 사로잡혔다.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회한, 영부인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짐이 되는, 이른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생존담에 그치지 않는다. 10·26은 군사정권 하에서 구축된 '개인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 체계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 구조적 붕괴의 순간이었다. 박상범은 이 극한의 경험을 단순한 상흔으로 남기지 않고, 훗날 '불사조'라는 상징으로 승화시키며 충성의 대상을 개인이 아닌 헌법과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체현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미 경호실 내부에서 박상범의 경력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공개채용 기수로 동기 20여 명과 함께 경호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후,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현장에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당시에는 권총을 뽑아 단상을 지키며 긴박한 상황에 대응했고, 1983년 아웅산 묘역 폭파 테러 때는 전두환 대통령 차량의 앞좌석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정 지연으로 화를 면했다. 여기에 1979년 10·26 사건에서 총탄을 맞고도 생존한 경험까지 더해지며, 그는 세 차례의 사선을 넘나든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이력은 단순한 경력의 축적을 넘어, 경호실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경험은 박상범에게 충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인식하게 했다. 충성은 더 이상 총알을 몸으로 막아내는 개인적 용맹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도 작동하는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권력을 보호하는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역량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하며 그는 권력의 생성과 붕괴는 물론 체제의 변화를 모두 목격한 산증인이었다. 김영삼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과 인식을 체화한 '불사조'였으며, 그의 경호실장 취임은 '새로운 정부'가 내세운 개혁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인사조치였다.
김영삼의 파격적인 선택
| ▲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9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미국 항공모함 키티호크 함상에서 함장으로부터 작전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
| ⓒ 대통령경호처 |
사실 박상범의 발탁보다 더 주목할 지점은 그를 선택한 김영삼의 판단이었다. 이전까지 경호실장 8명은 모두 대통령 최측근이거나 군사정권이 임명한 현역 장성 출신으로, 경호 조직은 군사 권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전문 경호관 출신을 경호실 창설 이후 최초의 내부 인사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조직의 성격 자체를 재정의하는 결정이었다. 특히 대선 정국에서 다수의 군 장성 출신 인사들이 논공행상을 기대하던 상황을 고려하면, 박상범의 발탁은 기존 권력 네트워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파격적 선택이었다. 이는 정실이 아닌 전문성과 제도적 정당성을 기준으로 경호 조직을 재편하겠다는 의지에 머물지 않았다. 경호실이라는 '성역'에 문민 통제를 본격적으로 관철시키겠다는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취임 전부터 경호실 내부에는 박상범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었다. 경호사의 신화적 인물로 불리던 그가 계급 정년에 따른 퇴직 이후 2년 만에 경호실장으로 복귀한다는 사실은 일종의 '금의환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반길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단순한 상관이 아니라 현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배 경호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 경호관 출신 수장의 등장은 현장 요원들에게 일정한 부담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감조차 경호실이 진정한 전문 경호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오히려 박상범의 경호실장 취임은 조직 내부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동안 사실상 닫혀 있던 '경호 책임자'의 자리가 능력과 경력을 갖춘 내부 조직원에게도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사 변화가 아니라 조직 문화의 방향을 바꾸는 신호였다. 문민화 과정에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변화와 혁신, 그리고 그에 따른 시행착오 역시 현장 경호관들에게는 감내 가능한 범주에 속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임무를 수행해 온 이들에게 제도적 변화의 불확실성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직의 성숙을 위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충성의 문민화'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시대적 전환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군사정권의 피로 얼룩진 제복 속에서 형성된 충성이 헌법 질서와 시민적 가치에 기반한 시스템적 헌신으로 재정의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과거의 충성은 상명하복의 절대복종과 대통령 개인을 위한 희생에 가까웠으며, 위기 상황에서는 맹목적 대응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러한 충성의 구조적 한계는 10·26 사태를 통해서 백일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이제 경호는 개인이 아닌 제도를 지키는 행위로 전환되어야 했고, 충성 또한 권력자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향해야 했다. 박상범의 취임은 바로 이 전환을 현실로 끌어올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호요원은 육감이 중요하다. 물체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뇌가 반응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약 0.2초가 걸리는데, 그 사이 사람은 약 2m를 이동할 수 있다. 결국 경호요원은 대통령과 가해자 사이 2m 이내에 위치해야 위협을 차단할 수 있다. 사람이 갑자기 움직이면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데, 이를 감지할 수 있어야 근접경호가 가능하다."
이러한 박상범의 수행경호론은 경호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출발점이었다. 훈련장은 더 이상 단순한 '위협 제거'의 격투 공간이 아니라, 상황을 선제적으로 읽어내는 '위험 예측'의 두뇌전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즉각적인 대응 능력보다 사전 감지와 판단 능력이 강조되면서, 경호는 반응의 기술에서 예측의 과학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훈련 방식의 수정에 그치지 않고, 충성의 개념 자체를 문민화의 흐름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과거의 방식은 일괄적으로 폐기되기보다 계승과 혁신의 틀 안에서 선별적으로 재해석되었으며, 현장의 헌신성과 긴장감은 유지하되 그 방향과 원리를 전환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개인 권력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서의 충성은 약화되고, 법과 제도, 헌정질서를 지키는 시민적 책임으로서의 충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경호요원을 단순히 위험을 차단하는 물리적 존재에서, 헌법적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공적 행위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었다.
박상범의 인식은 명확했다. "경호실은 권력의 그림자가 아니라 헌법, 법과 질서의 방패로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문민화된 충성은 '제도 수호'이며, 대통령 개인을 넘어 헌정질서를 지키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군사 잔재 청산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는 경호 체계를 의전 중심에서 위기관리 중심으로 전환하고, 폐쇄적 비밀주의를 걷어내며 투명한 기록과 보고 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단순한 운영 방식의 개선이 아니라, 충성의 대상과 방향 자체를 재설정하는 작업이었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경호실의 조직 문화와 작동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이른바 '경호 DNA'의 전환으로 이어졌다.
박상범은 충성의 문민화를 통해 경호실을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헌법의 기관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는 경호실이 더 이상 권력자의 의중을 무조건 수행하는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전문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권위와 위계에 기대어 복종을 강요하기보다, 조직 구성원들이 스스로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도록 설득의 언어를 앞세웠다. 과거의 경호실장이 권력자에게 대한 절대 충성을 강조했다면, 그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 시스템'을 지키는 경호를 주문한 셈이었다. 충성이 명령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결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 것도 바로 그 연장선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운영 방식의 수정이 아니라, 군사정권의 경호 관행을 문민정부의 통치 질서에 맞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박상범에게 경호란 권력을 감추고 둘러싸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을 제도 속에 위치시키고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행위에 가까웠다. 따라서 경호실의 역할도 비밀 유지와 차단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안정적으로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 되어야 했다. 그는 경호실 내부의 분위기와 언어, 조직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까지 바꾸려 했다. 이러한 방향에서 자신의 리더십을 명령보다 설득에 가까운 방식으로 구현했다. 군사정부 시절의 절대적 권위가 아니라, 전환기의 관리자로서 조직을 새 질서에 적응시키려 한 것이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안팎에는 실제로 개방의 기운이 뚜렷하게 번졌다. 김영삼은 1993년 2월 취임 직후 집무실 한쪽 모퉁이의 방문을 열었다가, 그 방 전체가 하나의 금고였다는 사실에 짬짝 놀랐다. 그 거대한 금고는 기밀 서류뿐 아니라 비자금을 보관하는 장치로 활용되었고, 일부 부품은 기중기로 옮겨야 할 만큼 규모도 컸다. 청와대 내부에서 군사정권의 흔적을 정리하는 동시에, 외부 공간도 점차 국민에게 열려 갔다. 경호상 이유로 출입이 제한되던 인왕산 통제가 풀렸고, 청와대 앞길 역시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개방되었다. 닫힌 경호에서 열린 경호로 넘어가는 변화는, 문민정부가 지향한 정치적 전환의 상징적 장면이자 새로운 국가 운영 방식의 서막이었다.
불과 17일 전 물거품이 된 1994년 남북정상회담
| ▲ 대통령경호실 경호요원들이 1996년 8월 청와대 영빈관 앞마당에서 경호시범을 보이고 있다. |
| ⓒ 대통령경호실 |
박상범의 경호실이 충성의 문민화를 추진하던 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1994년 남북정상회담이 끝내 성사되지 못한 일이었다. 김영삼이 취임과 함께 남북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밝히면서 논의는 시작됐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김일성이 정상회담에 응할 뜻을 내비치며 급물살을 탔다. 이어 남북정상회담의 절차와 형식을 협의하기 위한 부총리급 수석대표의 예비접촉이 같은 해 6월 28일 판문점에서 열렸고, 이 자리에서 양측은 1994년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평양에서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한반도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의 분위기 속에서, 세기의 이벤트는 마침내 현실이 되는 듯했다.
경호실은 남북 정상들의 역사적 회담을 앞두고 최고 수준의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7월 1일 열린 대표접촉과 이후의 실무협의에서는 권총 1자루의 휴대 여부, 차량 좌석 배치 같은 세부적인 합동경호 방안까지 치밀하게 논의됐다. 박상범은 한반도가 여전히 준전시 상태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 최고위급 경호작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실제로 경호실은 구두 뒤축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 바닥을 세게 차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까지 거론할 정도로 극단적 상황에 대비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자리에 테러가 발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바로 그만큼 경호당국이 한 치의 소홀함도 허용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모든 준비는 정상회담이 17일 앞으로 다가온 7월 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기회는 그렇게 한순간에 멈췄고, 경호실이 공들여 설계한 합동경호 구상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이 무산은 단순한 외교 일정의 취소를 넘어, 문민정부가 꿈꾸었던 평화체제의 출발선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박상범의 경호실이 추구한 '충성의 문민화'가, 비록 완결되지는 못했더라도 국가적 변곡점 앞에서 얼마나 치밀하고 제도적으로 작동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남북 합동경호의 역사 자체는 끝내 쓰이지 못했지만, 당시 경호와 통신 분야의 실무회담에서 오간 논의는 2000년 김대중 정부가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할 때 경호 매뉴얼의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남북 경호당국이 정상회담을 위한 합동경호를 놓고 한자리에 마주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대통령 행사를 앞두고 경호환경을 분석할 때 북한 변수는 언제나 가장 까다로운 문제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 의미는 더욱 크다. 극한 대치의 국면을 넘어 협상 테이블에 도달했던 성과가 이후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북미관계가 다시 최악으로 치닫는 흐름 속에서 같은 기회가 재현되지는 않았더라도, 경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진전이었다.
박상범이 강조한 것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집념과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집중력이었다. 그는 경호를 단순한 절차의 나열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종합예술이자 과학으로 이해했다. 경호관은 공간을 읽는 능력은 물론, 날씨와 사람의 심리, 나아가 그때의 정치적 상황까지 함께 살피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박상범의 신념이었다. 경호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최대한 줄여야만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자신이 겪었던 경호 실패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절실한 다짐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보기에 경호의 성패는 장비의 성능보다 경호를 수행하는 사람의 태도와 판단력에 달려 있었다.
충성의 문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현장 경호관들의 역량이 한층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점도 중요한 변화였다. 이전에는 경호기법이 주로 도제식 방식으로 전수되었지만, 열린 경호가 도입되면서 보다 세밀하고 표준화된 교육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 결과 각종 교범과 실무 지침이 만들어졌고, 경호는 개인의 감각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제도와 훈련이 결합된 체계로 옮겨갔다. 이는 단순한 업무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문민정부가 지향한 경호의 새로운 질서를 현장에 안착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경호관은 더 이상 권력에 순종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헌법과 법치 아래에서 국가 안전을 책임지는 전문직으로 거듭날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시민의 언어로 거듭나지 못한 충성의 문민화
박상범은 세밀한 원칙주의자였다. 법학을 전공해 법과 규정의 의미를 머리에 새겼고, 베트남전에서 사선을 넘으며 작은 실수가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이었다. 해병대 장교이자 군사정부 시절의 충성은 '명령 복종'이었으나, 문민정부에서의 충성은 '원칙 준수'여야 했다. "누구의 잘못이 있다면 상대가 대통령이라 해도 직언을 하는 게 진짜 충성"이라고 말한 그의 신념은, 권력의 논리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한 위험한 선언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박상범의 비전은 문민정부의 이상과 맞물렸으나, 현실의 벽은 높기만 했다. 충성의 문민화를 가로막는 문민정부의 실세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김영삼은 '깨끗한 정치'를 화두로 삼았다. 박상범 역시 충성의 문민화를 추진하며 원칙을 준수하는 경호 임무 수행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문제의 발단은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의 전횡이었다. 김현철은 측근을 통해 박상범에게 '김영삼의 사설 경호원들을 경호실에 특별 채용해 달라'고 청탁해 왔다. 박상범은 망설임 없이 "경호실 직원이 되고 싶으면 공채 전형을 통해 들어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설 경호원들도 공채에 응모했으나 합격자 명단에 오르지는 못했다. 충성의 문민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도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거절은 박상범이 원칙을 권력보다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는 비록 문민정부의 이상과 자신의 비전이 일치한다고 믿었더라도, 실제 권력 구조 속에서 원칙을 지키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박상범은 공채 원칙과 제도적 정통성을 버리지 않았고, 충성의 문민화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실제 운영 원리로 작동해야 함을 입증하려 했다. 그의 선택은 경호실 내부에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의미도 있었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충성은 궁극적으로 경호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메시지가 함축된 것이다.
김현철의 전횡에 맞선 박상범의 원칙 선언 관련한 파열음은 간단치 않았다. 채용 관련 해프닝이 빌미가 되어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로 변했고, 1994년 초반 김현철의 국정 개입과 관련된 시중의 여론을 김영삼에게 전달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박상범은 경호실장으로서 대통령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며 충정 차원에서 그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었지만, 이는 김현철의 눈 밖에 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박상범과 김현철을 비롯해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박상범은 김현철을 향해 "지금 여론이 어떤 줄 아느냐. 그런 식으로 하다간 나중에 청문회에 서게 된다"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주변 인사들이 박상범에게 김현철과의 화해 차원에서 사과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박상범의 경질로 해프닝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박상범의 직언은 충성의 문민화가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그는 충성의 문민화를 추진하며 어떠한 외부 간섭도 거부하고 "총알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게 진짜 경호다. 내부 부패에서 오는 총알이 더 치명적이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향한 총알은 막아낼 수 없었다. 충성의 문민화를 위협하는 월권에는 저항할 수 있었으나, 자신을 겨눈 총알을 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시민의 언어로 거듭나지 못한 충성의 문민화는 차세대의 비전으로만 남았다.
마치 예정되었던 것처럼 1994년 12월20 일 박상범은 경질 통보를 받았다. 경호사를 빛낸 불사조에게 경호실장 재임 1년 10개월은 너무나 짧았다. 후임은 육사 17기로 육군대학 총장을 지내고 문민정부에서 병무청장을 역임한 김광석이었다. 조직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다지만, 20세기에 이뤄진 충성의 문민화 실험은 과도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처를 남긴 채 후퇴했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상범의 경호실에서 시도된 충성의 문민화 실험은 실패한 도전이 아니라 씨앗을 뿌린 성과였다. 군사 충성의 독재적 뿌리를 끊고, 법과 규정에 따르는 충성이 무엇인지 확인했다는 점에서 경호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문민정부는 개혁을 국정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며 하나회 숙청을 통해 군과 권력의 결합을 끊으려 했다. 군사 권위주의에서 제도적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박상범의 경호실이 탄생했지만, 전횡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미완의 성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경호실 공채 출신의 수장 취임으로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던 충성의 문민화.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학계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중부대 교수 조광래는 2013년에 발표한 '전문형 대통령경호실장에 대한 사례연구'에서 "국가안보를 생각하고 전문성을 감안해 국익을 위한 경호실장을 임명해야 한다"면서, 전문성이 가장 탁월했던 역대 경호실장으로 박상범을 꼽았다.
"경호실장의 권력은 대통령과의 신임 관계나 물리적 거리에 의한 게 아니라 합법성과 전문성에서 나온다"는 조광래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4 년 12·3 비상계엄 사태를 떠올려 보면, 경호실장과 대통령, 권력의 관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박상범은 2005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10·26 때 살아남은 건 우연이 아니다. 경호를 제도로 바꾸라는 천명이었다. 문민화는 아직 진행형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현재의 경호처도 박상범이 깔아놓은 토대 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충성은 더 이상 군복의 메아리가 아니라 헌법의 맥박이어야 한다는 것을 박상범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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