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전
진료 때 보호자 안심시키기… 교실서 학생 불안 읽어내기… AI는 못하는 ‘연결 노동’
2026.06.06 00:41
사람의 마지막 직업
앨리슨 J. 퓨 지음|김재경 옮김|추수밭|538쪽|2만8000원
#1. 중학교 교사 켄은 교실에서 스파이더맨이 사용하는 초인적 감지 능력인 ‘스파이더 센스’(켄의 표현이다)를 발휘하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저쪽이 유독 조용한데?’ ‘얘가 왜 이리 힘이 없지?’ 같은 생각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는 학생들의 얼굴 표정, 사소한 몸짓, 평소랑 다른 점 등을 잽싸게 읽어내는 데 도가 텄다.
#2. 상담 치료사 완다는 내담자와 상담이 제대로 진행될 때 “몽롱하거나 찌릿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말한다. 반면 무언가 잘못될 때는 “멈칫하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럴 땐 상담실에 싸늘한 공기가 감돈다. 그는 내담자가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말 이면에 숨어 있는 감정의 흐름을 듣는다. 완다는 상담사로 일하며 주변의 공기를 읽는 능력을 갖게 됐다.
#3. 소아과 의사 그레타는 자신의 주된 업무가 “과도하게 불안해하는 어머니들을 안심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레타는 아이가 심하게 아프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 아이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는 요새 어떠세요?” 어떤 어머니들은 그레타의 친절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레타의 영리한 영업 비결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사회학과 교수인 앨리슨 J. 퓨는 연구를 위해 약 5년 간 교사·상담사·의사·관리자 등 온갖 분야에 종사하는 직업인 10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그가 알게 된 것은 어떤 직종이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읽는 능력을 발휘해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켄, 완다, 그레타 모두 이를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이들의 ‘본업’은 아니지만, 본업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노동의 한 형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추가 노동을 인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이 저자가 연구를 진행하던 당시의 상황이다. 고용주, 정책 입안자, 연구자들조차도 이 숨은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이를 일컫는 명칭이 없는 게 문제였다. 이에 저자는 ‘연결 노동(connective labor)’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고안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호작용을 통해 성과를 내는 노동 방식이다. ‘감정 노동’과 달리 타인과의 긍정적 상호 연결에 더욱 주목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경험은 한 개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연결 노동에서 드러나는 친밀한 관심은 “인간이 서로를 인간답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AI)이 인간 일자리를 대체하는 오늘날, 저자는 인간이 일자리를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일하는 방식도 잃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 연결 노동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진다. 저자는 연결 노동을 뼈, 장기, 근육을 제자리에 유지하는 얇은 연결 조직인 ‘근막’에 빗댄다. 근막이 없으면 우리 몸은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연결 노동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장인의 기술’이다. 연결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는 ①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 ②감정을 읽고 활용하는 것 ③협력하는 것 ④즉흥성에 대응하는 것 ⑤실수를 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것 등이다. 몸과 감정을 가진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선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일쑤다. 그때그때 분위기를 파악해 상호 협력해야 하는 연결 노동은 ‘즉흥 라이브 공연’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연결 노동의 가치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연결 노동은 끊임없이 표준화와 자동화의 압박에 시달린다. 의사들은 업무 효율화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느라 과부하에 걸린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교류를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는 반복적 일로 대체할 때, 필연적으로 노동 소외가 일어난다. 저자는 이때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미래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책은 연결 노동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미래에 연결 노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원제는 ‘The Last Human Job’(2024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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