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전
21세기 킨들버거 함정…미국도 중국도 혼자선 해결못해
2026.06.06 00:02
[1·2차 대전의 거울에 비친 2026년] 중앙SUNDAY·EAI 공동기획 ④ 패권의 공백에서 패권의 한계로
경제공황에서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전간기의 경험은 주권국가들이 각축하는 무정부 상태의 국제정치에서 패권국의 질서 부여 역할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MIT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세계 대공황(The World in Depression 1929~1939)』에서 패권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극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영국은 할 수 없었고, 미국은 하려고 하지 않았다.” 패권국의 임무는 단순한 강대국의 지배가 아니다. 위기 때 수입시장을 열어 수요를 흡수하고 경기침체기에는 장기자금을 공급하며 금융공황이 닥쳤을 때에는 최종 대부자로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스무트-홀리 관세법으로 시장을 닫았고 유럽에 대한 자금공급은 끊겼으며 각국은 금과 유동성을 지키기 위해 경쟁적 평가절하와 보호주의로 치달았다. 킨들버거에 따르면 모든 나라가 자국의 사적 이익을 지키려 돌아섰을 때 세계의 공공이익은 무너졌고, 그 결과 각국의 사적 이익마저 함께 붕괴했다. 대공황은 그렇게 경제위기를 넘어 전간기 국제질서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권 충돌 ‘투키디데스’와 정반대 함정
조지프 나이는 2017년 이 통찰을 ‘킨들버거 함정’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흔히 두려워하는 것은 부상하는 중국과 기존 패권국 미국이 충돌하는 ‘투키디데스 함정’이다. 그러나 나이는 정반대의 위험도 지적했는데 중국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책임 있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중국이 국제질서의 혜택은 누리면서도 금융 안정, 기후변화 대응, 해양의 자유와 같은 세계 공공재 공급에 충분히 기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패권의 충돌이 아니라 패권의 공백 속에서 흔들릴 수 있다.
첫째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라는 변화이다. 냉전 종식 직후 미국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가량을 차지했고, 압도적 군사력과 달러 패권을 바탕으로 자유무역, 금융 안정, 해양 질서, 동맹 안보를 떠받쳤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 글로벌 사우스의 성장, 미국 내부 산업기반의 약화는 미국이 부담하는 비용과 미국이 얻는 이익 사이의 균형을 흔들었다. 미국이 설계한 자유무역 질서가 중국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다는 인식은 미국 국내정치에서 분노와 배신감으로 전환되었다. 국제 공공재의 공급자가 스스로 그 질서의 피해자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는 국제공공재 수요의 폭증이다. 킨들버거가 분석한 1930년대의 국제 공공재는 주로 통화 안정, 개방시장, 위기 시 유동성 공급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질서가 요구하는 공공재는 기후변화, 팬데믹, 인공지능 거버넌스, 사이버 안보, 핵 비확산, 공급망 안정, 에너지 전환, 해양 안보, 우주 질서까지 확장되었다. 이 문제들은 군사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기후변화는 미사일로 막을 수 없고 팬데믹은 국경봉쇄만으로 멈추지 않으며 인공지능과 사이버 위협은 항공모함으로 통제할 수 없다.
패권의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트럼프의 선택은 공공재 제공의 임무 방기가 아니라 공공재의 조건부 전환이다. 달러 결제망은 제재의 무기로 쓰이고 동맹은 비용 분담의 조건 아래 재정의되며 기술표준과 공급망은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에만 선택적으로 개방된다. 이것은 공공재를 제공하되 접근권과 혜택을 일방적으로 통제하려는 ‘강압적 클럽재화’다. 표면상으로는 패권적 질서의 유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재를 조건화하는 과정이다.
문제는 이 전략이 단기적으로 협상력을 높이는 듯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의존해온 구조적 권력 자체를 침식한다는 데 있다. 미국의 힘은 단순한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가 아니라 달러, 기술, 동맹, 제도, 표준이 결합된 세계 네트워크의 중심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달러 결제망이 무기화될수록 각국은 대안을 찾고, 동맹이 거래적으로 운영될수록 신뢰는 약화되며, 기술표준이 봉쇄 수단이 될수록 세계경제는 진영별로 분절된다. 구조적 권력은 공공재로 작동할 때 정당성을 얻지만 강압의 사유재로 바뀌는 순간 저항의 대상이 된다.
결국 오늘의 위기를 전간기의 단순한 반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시에도 패권국의 능력과 의지가 약화하였고 보호주의가 퍼졌으며 각국은 공동의 안정보다 자국의 방어를 앞세웠다. 전간기의 킨들버거 함정은 기본적으로 공급자의 부재였다. 개방시장, 안정된 통화질서, 위기 시 유동성 공급이라는 공공재 목록도 비교적 분명했다.
오늘의 함정은 다르다. 지금의 문제는 미국이 물러나고 중국이 대신 나서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국제공공재는 너무 넓고 복잡하며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팬데믹은 공급망 위기로, 공급망 위기는 인플레이션과 기술안보 문제로, 기술안보는 다시 동맹정치와 군사전략으로 번진다. 미국의 의지가 회복되어도, 중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 어느 한 국가가 21세기의 복합 공공재를 단독으로 감당할 수는 없다. 미국이 약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패권국이 해야 할 일 자체가 어떤 패권국의 능력도 초과하게 된 것이다.
21세기 킨들버거 함정의 출구는 미국의 부활도, 중국의 대체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집합 패권’ 혹은 ‘공동의 리더십’이다. 지구화의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를 넘어선 거버넌스의 층위를 쌓아가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주권의 일부를 공동 기구에 이양하는 가장 진전된 실험이고, 기후협약과 핵 비확산 체제도 완전한 주권 논리만으로는 작동할 수 없다. 단일 패권국이 모든 공공재를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한 능력과 이해관계를 가진 복수의 행위자들이 사안별로 책임을 나누는 질서다. 기후는 주요 배출국 연합이, 핵 비확산은 핵보유국과 비핵국의 제도적 합의가, 금융 안정은 주요 20개 국(G20)과 국제금융기구가, 인공지능(AI) 거버넌스는 선도 기술국과 주요 기업이 함께 맡는 방식이다. 어느 하나도 완전하지 않지만, 부분적 연합들이 중첩될 때 전체 공공재 공급량은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쉽게 일어나기는 어렵다. 트럼프식 강압적 클럽재화가 한계에 부딪힌 뒤에야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달러 무기화가 탈달러 움직임을 키우고, 동맹의 거래화가 신뢰를 약화하며, 지역 핵확산과 기후 공공악이 임계점에 가까워질 때, 세계는 새로운 제도적 합의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자유주의 질서가 미국 주도의 설계였다면 다음 합의는 미국·EU·중국·인도·일본, 한국, 글로벌 사우스, 국제기구와 민간 기술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다층적 지구 거버넌스여야 한다.
한국, 공공재 공급의 핵심 참여자 돼야
한국은 그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과거 한국은 미국이 제공한 안보와 자유무역 질서의 수혜자였지만 이제는 반도체 공급망, 핵 비확산, AI 안전 규범, 개발협력 등에서 국제 공공재 생산의 일부를 맡을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질서의 소비자에서 질서의 설계자로 전환하는 경로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공공재를, 누구와 함께 공급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나이가 킨들버거를 빌려 던진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함정의 모양은 바뀌었다. 21세기의 킨들버거 함정은 패권의 부재만이 아니라 패권 방식의 실패에서 온다. 전간기에 영국은 할 수 없었고 미국이 하지 않으려 했다. 2025년에는 미국이 하려 하지만 방법이 틀렸고, 세상은 이미 혼자 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해법은 단일 패권의 복원이 아니라 집합적 공공재 공급의 제도화다. 한국은 그 설계의 주변부가 아니라 가능한 영역에서 핵심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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