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000배 더 안전한 차세대 SMR”…미국 AI 시대 에너지 확보 길 트다
2026.06.05 06:02
지난달 28일(현지시각)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2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와이오밍주 케머러. 해발 2200m 고지대의 황량한 벌판에 서자 거센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들었다. 현장 안전 브리핑에 나선 관계자는 “고도가 높아 두통이나 피로, 메스꺼움 같은 고산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알려달라”며 “현장에서 화살촉이나 유물 같은 문화재가 발견되면 즉시 신고해달라”고 당부했다. 원전 건설 현장이라기보다 미국 서부 개척지 한복판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한때 이 지역 경제를 떠받쳤던 노턴 석탄화력발전소가 뿜어내는 연기가 길 건너에서 피어올랐다. 석탄 시대를 상징하던 이 척박한 땅은 이제 미국 차세대 원전 실험 무대로 변신 중이었다.
이날 베일을 벗은 미국 원전기업 테라파워의 소형모듈원전(SMR) ‘케머러 1호기’ 건설 현장은 인공지능(AI) 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세운 이 회사는 지난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미국 내 첫 상업용 첨단 소형모듈원전 건설 허가를 받았다. 4세대 첨단 원전으로서는 미국 내 최초 승인으로, 이 기술에 거는 미국 정부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미디어데이를 맞아 현장을 찾은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CEO)는 “우리의 차세대 원전은 기존 원자로보다 확률적으로 약 1000배 더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르베크 최고경영자의 자신감은 기존 대형 원전의 맹점이었던 ‘고압’과 ‘물’을 버린 데서 나온다. 테라파워는 물 대신 액체 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소듐냉각고속로(SFR)’ 방식을 채택했다. 기존 경수로는 300도가 넘는 운전 환경에서 물이 끓지 않도록 대기압의 150배에 달하는 고압을 유지해야 한다. 배관이 파손되거나 외부 전원이 끊겨 냉각 기능이 마비되면 수소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대표 사례다. 반면 액체 나트륨은 880도 고온에서도 끓지 않아 대기압 수준의 저압 환경에서 운용할 수 있다. 테라파워 쪽은 고압을 견디기 위해 원자로를 두껍게 짓지 않아도 되어서 원자로 자체를 지하에 설치해 방사성 물질 확산 가능성을 극도로 줄였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반경 20~30㎞에 달하던 대형 원전의 안전구역인 비상계획구역(EPZ)을 약 300m 수준으로 좁힐 수 있었다.
부지가 줄어든 만큼, 전기가 필요한 곳 근처에 짓기도 수월해 대형 송전선로 건설 등의 부담도 적다. 작고 가벼워진 설비는 ‘모듈화’라는 건설 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현장 관계자는 “공장에서 모듈을 제작해 현장에선 조립만 하면 되기 때문에 공사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며 “반복 건설이 궤도에 오르면 비용은 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르베크 최고경영자는 “이러한 강점 덕분에 메타가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을 위해 우리 원자로 최대 8기를 선택해 현재 부지를 선정 중”이라고 설명했다.
테라파워의 소형모듈원전 프로젝트에는 한국 기업들이 파트너로 깊숙이 엮여 있다. 에스케이(SK)이노베이션과 에스케이(SK)㈜는 2022년 2억5000만 달러(약 3800억원)를 공동 투자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도 에스케이 지분 일부를 인수해 합류했고, 에이치디(HD)현대와 두산 등도 핵심 부품 공급에 뛰어들었다. 르베크 최고경영자는 “이 기술은 미국에서 시작하지만, 케머러와 향후 지어질 원전에는 한국의 제조 역량과 기술적 기여가 포함될 것”이라며 “미국은 최근 원전을 많이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첫 프로젝트를 제때 완수하고 규모를 확장하려면 한국과의 파트너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에스케이 역시 이를 단순한 재무적 투자로 보지 않는다. 케머러에서의 실증 경험을 발판 삼아 2035년 국내에 첫 4세대 소형모듈원전을 건설한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테라파워 기술의 아시아 시장 독점 활용 권리까지 확보한 만큼, 전력 수요가 폭발하는 베트남 등 아시아 진출도 검토하고 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케머러 1호기는 이제 막 첫 삽을 뜬 상태로, 실제 상업 운전을 통해 안전성과 경제성이 입증되진 않았다. 팻 영 수석부사장은 “현재 우리는 이 첫 원전들을 짓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는 동시에, 첫 원전이 가동될 때쯤 약 12기를 동시에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공급망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 모든 걸 제때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도전”이라고 말했다. 소형모듈원전이 크기를 줄이고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고는 하지만, 핵분열 기술을 이용한다는 본질은 같아 까다로운 부지 선정과 지역 주민 설득이라는 만만찮은 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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