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소녀들의 결핍 이야기
2026.06.05 04:35
각색-제작 허평강 감독
“아날로그 작업 고수, 원작에 감성 더했죠”
“소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김초엽 소설가의 팬이라면, 낯익은 문장일 것이다. 그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수록작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나오는 글귀다.
3일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개봉했다. 메가폰을 잡은 이는 허평강 감독(44·사진).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이 연출가를 2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책을 접한 건 2019년 제작사 추천이었다고. 7개의 단편 중 ‘순례자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시초지에서 고향 행성으로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을 다룬 단편을 읽으며 허 감독의 머릿속엔 다채로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듬해 김 작가와 애니메이션 판권 계약을 맺고 제작에 돌입했다. 허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안 ‘대’ 김초엽 작가님이 되셨다”면서도 “이 점을 의식했다면 과감한 도전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원작의 큰 설정들을 대범하게 변주한다. 일례로 원작에서 소피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에 그치지만, 영화에선 행성의 규칙에 의문을 갖고 시초지로 향하는 적극적인 캐릭터로 탈바꿈한다. 허 감독은 “원작을 읽으며 ‘소피가 누구이길래 데이지가 이런 편지를 남긴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영화는 데이지와 소피의 관계성을 추가하며 감성적인 터치를 더했다.
“일본에서 주로 거대 자본 기반의 하이퀄리티 필름을 맡아 왔어요. 그런데 기교가 화려할수록 메시지가 심플하게 다가가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작품은 더 클래식한 그림체가 맞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요즘의 미감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호불호는 갈릴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귀마와 요괴 캐릭터의 초기 디자인을 맡았던 위현송 씨가 참여했다.
허 감독이 그에게 주문한 건 딱 두 가지였다. “너무 예쁘지 않을 것”, 그리고 “대신 그들의 결핍이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울 것”. 허 감독은 “핸디캡이 있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소녀들의 이야기이기에 완벽하진 않아도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원했다”고 말했다.
‘데스노트’, ‘명탐정 코난’ 등을 연출하며 일본 콘텐츠 산업에 깊숙이 몸담았던 허 감독은 이 영화가 한국에서 첫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그에게 한국 콘텐츠 시장은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까.
“일본은 실패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드라마만 봐도 원작 판매 부수에 따라 영상화가 결정되죠. 그래서 프로듀서와 배우의 ‘촉’을 믿고 도전하는 한국 시장만의 매력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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