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모던보이 사로잡은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해방구
2026.06.05 02:14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거리가 서울 성북구에 있다. 발 닿는 골목 곳곳에서 근현대 문화예술인이 살던 옛 한옥을 만날 수 있는 거리다. 1960~70년대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대량 공급된 밀을 주재료이자 밑천 삼아 개업한 유서 깊은 가게들도 늘어서 있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국숫집과 제과점에 들를 수 있는 이곳은 ‘성북밀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북밀로는 성북동과 삼선동을 잇는 ‘성북로’와 밀가루의 ‘밀’을 합친 이름이다.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이 2024년부터 운영한 약 6㎞ 길이의 음식·문화거리다. 시작점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이다. 근현대 유적지·전시관 19곳과 밀을 재료로 한 음식점·빵집·카페 69곳이 거리에 어우러져 있다.
성북밀로를 따라 올라가면 양옆으로 옛 문화예술인이 살던 한옥을 볼 수 있다. 1930년대 예술인들은 인구가 늘어나는 사대문 안을 피해 도성 밖 성북로로 모여들었다. 소설가 박태원·이태준, 시인 한용운·조지훈, 음악가 채동선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북한산과 성북천으로 둘러싸여 자연풍광이 뛰어난 이곳에서 영감을 얻으며 작품 활동을 했다.
문화예술인들이 남긴 역사·문화 자원은 성북밀로의 핵심 콘텐츠다. 이태준이 1933~46년 거주하며 문인 김기림, 정지용, 이효석 등과 문학을 주제로 논의했다는 한옥 ‘수연산방’에선 은은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전통찻집으로 개조된 뒤에도 수연산방이 늘 손님들로 북적이는 이유다. 한용운이 1933~44년 살았던 ‘심우장’은 언덕에 위치해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한다.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1976~84년 살았던 고택 ‘최순우 옛집’뿐 아니라 조지훈·박태원·음악가 윤이상 집터 등도 남아 있다. 사찰 ‘길상사’는 북한산의 짙은 녹음과 어우러진 경관을 선보인다. 길상사는 군사정권 시절 유명했던 요릿집 ‘대원각’이었는데 1997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특색 있는 음식점과 제과점은 성북밀로의 큰 매력이다. 정부는 1960~70년대 분식 장려 운동을 펼쳤다. 쌀을 아끼려고 상인들에게 밀로 만든 음식을 판매할 것을 강권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 거리에 밀가루를 재료로 한 음식점과 제과점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오랜 시간 유지한 간판 자체가 맛의 품질 보증서다. 대표적인 곳이 1968년 성북천변에 개업한 뒤 2007년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앞으로 확장 이전한 제과점 ‘나폴레옹 과자점’이다. 나폴레옹 과자점은 단팥빵, 슈크림빵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서울 3대 빵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서울 전역에 직영점을 6곳 둘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국숫집도 유명하다. 1969년 문을 연 ‘국시집’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전 단골집으로 이름을 알렸다. 깊은 사골육수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멸치국숫집 ‘구포국수’, 이북식 메밀냉칼국수집 ‘하단’도 점심시간이면 손님들로 꽉 차는 맛집이다.
골목마다 숨어 있는 아기자기한 베이커리와 카페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밀곳간’ ‘사뽀블랑’ 등 빵집은 주말이면 빵을 사려는 시민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미술·박물·문학관도 빼놓을 수 없는 즐길거리다. ‘간송미술관’ ‘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변종하 미술관’ ‘성북근현대문학관’ 등이 기다리고 있다.
성북밀로 일대는 자연경관지구로 지정돼 있다. 16m 이상 높이의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지역이다. 북한산과 유적지, 전시관, 낮은 건물이 절묘하게 뒤섞여 ‘도심 속 시골’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 덕분에 성북밀로의 자연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직장인 김호진(33)씨는 4일 “이 거리는 북한산을 병풍처럼 뒤에 두고 옛 건축물과 음식점들을 품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강현희(22·여)씨는 “이 일대는 빌딩 숲에서 벗어나 차별성이 있다”고 말했다. 성북밀로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모던한 취향의 청년들을 더 불러모을 것으로 기대된다. 성북구에는 고려대, 한성대, 국민대 등 대학 8곳이 몰려 있다.
서노원 성북문화재단 대표이사
“지금 찾든 30년 뒤 찾든 매력 있는 거리”
“지금 찾든 30년 뒤 찾든 매력 있는 거리”
성북밀로의 목표는 늘 사람들로 붐비는 ‘1등 거리’가 아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이나 성동구 성수동, 영등포구 여의도 한강공원처럼 북적이면 특유의 고즈넉함이 사라져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북밀로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졌다. 성북밀로 기획에 참여한 서노원(사진) 성북문화재단 대표이사는 4일 “이 거리의 빵집·카페 중 약 80%가 1인 혹은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이다. 이들이 오랫동안 자생할 수 있으려면 유행에 휩쓸리는 거리가 돼선 안 된다”며 “지금 찾든 30년 뒤에 찾든 언제나 매력적일 수 있는 거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작된 참여형 커뮤니티 ‘라이프 클럽’은 성북밀로의 뿌리를 단단히 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라이프 클럽 참가자들은 성북밀로에서 제과, 독서, 운동 등의 활동을 함께한다. 지금까지 107명이 참여했다. 재참여 의사가 100%에 달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서 대표는 “참가자들은 라이프 클럽에서 형성한 관계를 기반으로 프로그램 종료 이후에도 성북밀로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며 자발적으로 모임을 한다”며 “당장 거리에 대한 인지도가 폭발적으로 높아지진 않겠으나 거리가 잔잔히 오래 유지되는 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거리에 대한 재단의 개입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각 가게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는다. 어느 빵집은 소금빵을 잘하고 다른 카페는 수제 케이크로 유명하다는 식”이라며 “점 단위로 흩어져 있는 각 매장을 선으로 연결해 방문객들이 이곳저곳 찾아다닐 수 있게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또 “성북밀로 지도를 만들어 여러 업장을 소개하는 것도 이 작업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접근성을 높이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현재는 인접 자치구인 종로구에서 성북밀로 북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다. 한성대입구역이 있는 거리 남쪽만 활성화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서 대표는 “공공버스 도입과 같은 해결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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