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려다 '이 책' 읽고 20년 근속해 버렸다 [김민철 작가의 서재]
2026.06.05 04:30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들어가 봅니다."베스트셀러가 꼭 나의 베스트일 수는 없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내 취향도 아닌 책을 꾸역꾸역 읽으며 써먹을 만한 문장을 갈무리한 것으로, 그렇게 한 권을 더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책 읽고 쓰는 광고쟁이로 20년을 살았던 김민철 작가는 퇴사를 하고서야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게걸스럽게 읽는 사람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쓰는 사람이었던 그조차 몰랐던 독서의 비밀을. '빨리 많이'가 아니라 '천천히 깊게' 책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게 되면서다.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그는 "천천히, 될 수 있는 한 깊이" 책 속으로 들어갔다. 책 한 권을 다섯 번도 읽고(五讀) 각자 삶에 비추어 저마다 다르게 읽어내는(誤讀), 이름하여 '오독오독 북클럽'도 운영 중이다. 돌아보면 퇴사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그를 회사에 붙잡아 둔 것도 책, 마침내 결단의 순간 그를 떠나게 한 것도 책이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책에 대해 묻기 위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을 찾았다.
서울에선 보기 드문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아파트에서 그는 12년째 살고 있다. 김 작가는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책 때문에 한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며 웃었다. 방 한 칸은 온전히 책에 내줬다. 도서관처럼 사람 한 명이 지나갈 통로만 남겨둔 채 책장과 책장을 마주 보게 배치했다. 책장 앞뒤로 빽빽하게 책을 꽂았다. 몇 권인지 세어보려 시도조차 한 적 없다.
철학도인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도서관 책장 앞에 서서 스펀지가 돼 책을 모조리 흡수해버리겠노라 결심했다고 한다. 철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글을 쓰며 살 거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기본부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 번에 여러 권을 빌려 순식간에 읽고 반납하던 그 시기 '나를 송두리째 바꾼 책'들을 잇따라 만났다.
한강 작가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은 그에게 한강이라는 세계를 열어준 작품이다. 2024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 지인들의 축하 인사를 받았을 만큼 그는 유명한 '한강 덕후'다. 카피라이터 시험을 쳤을 때 '책 한 권을 추천하는 글을 써보라'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검은 사슴'에 대해 써 내려갔고,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이때 읽고선 이들의 모든 책을 섭렵했다. 은희경 윤대녕 배수아 이성복 김혜순 등 한국 문학으로도 독서 지형을 넓혀갔다. 문학은 지금도 그의 책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설과 문인이 쓴 에세이를 특히 좋아하고, 이야기꾼 스타일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싫어하는 게 너무 많다. '이런 걸 왜 쓰지' 싶은 책도 꽤 있다"며 "그래서 좋아하는 게 생기면 더 힘껏 좋아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가려던 계획을 바꿔 2005년 글로벌 독립광고회사 TBWA코리아에 입사했다. '나는 책, 음악, 미술을 좋아하는데, 이 모든 게 다 있는 곳이 광고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지원했다. 그리고 3년 차 때 벌써 퇴사를 공언했다. 당장 떠날 용기도 없으면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남들 보기에 카피라이터는 그의 천직이었다. 그는 그 회사에서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까지 오른 첫 사례다.
SK텔레콤의 '사람을 향합니다', 네이버 '세상의 모든 지식', e편한세상의 '진심이 짓는다' 등 주옥같은 카피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두면 되고/ 견디다 보면 또 월급날 되고" 2008년 직장인 사이에서 화제를 모은 '되고송' 역시 그의 손에서 나왔다. 철야 중 새벽 2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억지로 써낸 카피였다고 한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프랑스 파리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사무실 책상 앞에 파리 지도를 붙여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책 한 권 때문에 무산됐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근하고 퇴근하던 어느 날 저녁, 그는 한 카페로 직행해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을 펼쳤다. 20대 중반의 카뮈가 출간한 에세이 '결혼'과 그 후 15년간 틈틈이 쓴 에세이를 모아 출간한 '여름'을 합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퇴사를 깔끔히 포기했다. 그는 "인생의 태도를 결정하게 만들어준 책"이라고 했다. "회사 안에서 조금 더 견뎌보기로 했어요. 인생에 뭔가 대단한 걸 바라기보다는 제가 있는 곳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남김없이 살아보기로 결심한 거죠." 대신 이 책을 들고 그는 카뮈의 무덤이 있는 프랑스 남부 소도시 루르마랭으로 여행을 떠났다.
퇴사 결심은 20년을 다니고서야 섰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라고 표지에 쓰여진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을 읽고 나서다. 어려운 철학서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얇은 책이다. 비에리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소설가. 김 작가는 "삶이 모호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자기 결정' 네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정리되곤 했다"며 "이 책에 기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자기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퇴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직접 쓴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추천했다. 그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진짜 간절한 마음에서 쓴 책"이라고 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성실하게 읽고 쓴 덕을 봤다. 개인 홈페이지에 끄적였던 10년 치 글이 편집자 눈에 띄어 묶인 '모든 요일의 기록'(2015)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회사를 다니면서 쓴 책만 7권이다. 2024년 1월부터 시작한 북클럽 활동의 기록은 최근 펴낸 독서 에세이 '오독의 발견'에 썼다. "카피라이터와 작가 사이를 오가면서는 하나로만 살고 싶다 했는데, 이젠 북클럽 운영까지 더해졌네요. 저 같은 내향형 집순이가 북클럽이라니. 하하" 독서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끝나지 않듯, 그의 읽고 쓰는 삶도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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