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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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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무가치함 넘어선 K컬처, 숲을 설계할 때

2026.06.04 18:09

■정민정 문화부장
음악·문학 안머물고 라이프스타일로 확장
문화와 산업 결합이 국가 경쟁력 높여
CJ문화재단, 20년 창작자 육성 본보기
‘K컬처 400조’ 선언, 이젠 생태계 키울 때
CJ문화재단의 대형 공연 지원을 받은 ‘튠업’ 24기 한로로의 콘서트 공연 모습. /사진 제공=어센틱
지난달 8일 미국 NBC의 심야 토크쇼 ‘투나이트쇼’에는 한국인에게 낯익은 장면이 등장했다.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이 맥주잔 위에 젓가락을 걸치고 그 위에 소주잔을 올린 뒤 테이블을 내려치자 소주잔이 맥주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명 ‘소맥’이었다. 진행자 지미 팰런은 놀라워했고 이내 ‘건배’와 ‘원샷’이 이어졌다. 대니얼 대 김은 “어린 시절에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지금처럼 ‘쿨’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한국 문화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고도 덧붙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구차한 설명이 필요했던 K는 그 자체로 빛나는 문화 자산이 됐다.

K컬처는 그간 장르의 경계를 넘어 확장해왔다. K팝과 K문학을 넘어 뷰티와 푸드·패션·관광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는 더 이상 개별 산업의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취향이자 생활 양식이며, 전 세계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감각의 언어가 됐다. 바야흐로 ‘K에브리싱(Everything)’의 시대다.

CNN이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K컬처의 성공 비결을 조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힘이 크다. 한국 문화에는 격동의 현대사와 압축 성장의 그늘, 경쟁과 소외, 상처와 회복의 기억이 켜켜이 스며 있다. 끝내 버티고 일어선 시간의 결이 콘텐츠에 각인됐기에 인종과 세대를 넘어 폭넓은 공감을 얻는 것이다. 이를 산업으로 작동하게 만든 기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음악에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글로벌 플랫폼이 있었고 영화에는 장기 투자와 인내의 시간이 있었다. 눈에 띄는 스타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토양이 있었다.

CNN은 그 토양을 묵묵히 일군 CJ문화재단에 주목했다. 2006년 10억 원의 사재를 출연해 재단의 기틀을 세운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전 세계인이 매년 한국 영화를 보고, 매달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한국 음악을 들으며 일상 속에서 한국 문화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 목표”라는 바람을 종종 밝혔다. 재단을 설립하기도 전인 1995년 그는 이미 K컬처의 가능성을 내다본 셈이다. 이미경 부회장이 전한 “문화의 힘이 산업과 결합할 때 국가의 진정한 경쟁력이 생긴다”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신념은 그 비전의 뿌리가 됐다. 재단은 음악의 ‘튠업’, 영화의 ‘스토리업’, 뮤지컬의 ‘스테이지업’을 통해 무명의 창작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더가든과 한로로 같은 뮤지션이 성장했고, 독립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 호명됐으며, 창작 뮤지컬은 무대에서 관객과 만났다.

CJ문화재단의 뮤지컬 지원사업인 ‘스테이지업’에 선정돼 무대에 오른 창작 뮤지컬 ‘홍련’. /사진 제공=마틴 엔터테인먼트
창작자의 재능이 씨앗이라면 산업은 토양이고 생태계는 계절이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토양이 메마르고 계절이 허락되지 않으면 숲은 자랄 수 없다. 오늘의 K컬처는 토양과 계절이 정성껏 가꾸고 빚어낸 숲의 성취다.

관건은 그 숲을 지켜낼 수 있느냐다. 최근 정부는 K컬처의 범주를 콘텐츠와 예술 산업에 그치지 않고 패션·푸드·관광까지 넓혀 2030년 시장 규모를 당초 300조 원에서 400조 원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영화 산업은 투자 위축으로 생태계 자체가 흔들리고 K팝 공연장을 비롯한 문화 인프라는 수요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창작자 지원은 여전히 박하고 세제 혜택 같은 실질적 장치도 충분하지 않다. 일부 민간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선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부 차원에서 중장기 플랜을 세우고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제작 인센티브와 중소 제작사 지원, 번역과 유통망 확충, 신인 창작자 육성에 이르기까지 문화 생태계 전반을 촘촘하게 설계해야 한다.

최근 묵직한 울림을 남기고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황동만(구교환)은 마침내 첫 영화를 찍고 신인감독상까지 거머쥔다. 황동만 뒤에는 그의 가능성을 끝까지 믿고 응원한 변은아 PD(고윤정)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수많은 대한민국의 황동만에게, 변은아 같은 존재가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K컬처 부흥을 위한 정부의 마땅한 역할이자 현실적인 약속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황동만이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정부가 탄탄한 생태계를 만들고 끝까지 뒷받침하는 조력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민정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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