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SMR 선박을 '해상 에너지 허브'로
2026.06.03 20:20
한국 산업통상부와 미국 상무부가 최근 '한미 조선 파트너십 이니셔티브(KUSPI)'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1500억달러 규모의 조선 협력 패키지가 본격적인 이행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과 소형모듈원전(SMR) 공동 협력을 공언하고 있으며, 우리 정부 또한 'K문샷 프로젝트'의 핵심 과제로 '친환경 SMR 선박 조기 실현'을 채택해 2035년 건조 착수를 목표로 민관 합동 추진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이제 SMR 선박은 단순한 미래 기술이 아니라 한미 동맹과 에너지 안보를 연결하는 전략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미래는 단순한 '원자력 추진 선박'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박 개념 자체를 바꾸는 발상의 전환이다.
첫째, LNG와 SMR의 결합은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라 '정박형 복합 에너지 플랜트'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SMR은 선박 추진 동력으로 활용하되, 대형 복합 SMR 선박은 특정 항만에 장기 정박하며 전력 생산과 LNG 재기화, 수소 생산, 해수 담수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해상 종합 에너지 허브'로 진화해야 한다. 외부에서 LNG를 공급받아 SMR의 열과 전기를 활용하는 이동형 플랜트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 기간 인프라가 된다.
둘째, 이는 산업 입지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인프라 혁명이다. 지금까지 산업은 발전소와 송전망, 가스관 같은 고정 인프라에 종속되어 왔다. 그러나 해상 플랜트는 수요지 인근 해역에 정박해 지역 특성에 맞는 에너지를 직접 공급할 수 있다.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발전과 가스 공급 기능을 강화하고, 산업단지나 저밀도 지역에서는 풍부한 폐열을 활용한 수소 생산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에너지가 산업을 기다리는 시대에서, 에너지가 산업을 찾아가는 '에너지 모빌리티' 시대로의 전환인 셈이다. 앞으로는 전 세계 어느 항만이든 필요시 곧바로 투입 가능한 온디맨드(On-demand)형 턴키 에너지 플랫폼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이동 가능한 원전은 님비(NIMBY)를 핌피(PIMFY)로 전환시키는 심리적 혁명이자 새로운 국제 규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원전을 육상에 두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전력과 세수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원자로 모듈 분리와 육상 처리 방식에 더해, 고도 밀봉된 폐기물의 심해 영구 격리 문제 역시 국제사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충분한 안전성과 국제 합의를 전제로 해야 하겠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런던협약 등 국제 규범의 시대적 재검토 또한 조심스럽게 시작할 시점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플랜트·원전 기술을 동시에 보유한 거의 유일한 국가다. 여기에 종합 설계적 상상력과 정책적 유연성이 결합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배를 수출하는 나라를 넘어 세계 에너지 플랫폼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 미래를 먼저 그려보는 담대한 상상력이다.
[제해성 아주대 명예교수·전 국가건축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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