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전
[내일의 태도]손절하는 나와 손절하기
2026.06.03 22:45
중학교 때 딱 한 번 반장을 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그때 각 학급의 반장 엄마끼리 만든 모임에 지금껏 참석하고 있다. 정말 이상하지 않나? 나는 정작 그 동창들과 친한 적도, 졸업 후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데 우리 엄마는 그 모임에서 20년째 ‘나의 엄마’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이름만 겨우 아는 중학교 동창들과 간접적으로 안부를 나눠야 한다는 게 싫어 매번 엄마에게 짜증을 내지만, 엄마는 그럴 때마다 자식과 관계없이 아줌마끼리 친구처럼 만나는 모임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도리어 화를 낸다.
누군가는 대기업에 취직하고, 누군가는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는 소식도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으라는 거다. 아니 엄마… 내가 걱정되는 건 그들에게 전해질 내 근황이야. 일도 관두고 결혼도 하지 않고 이상한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내 소식은 대체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 건데…
인간관계에서 엄마는 끊어내는 법을 모른다. 아무리 크게 싸워도 끈질기게 다시 연락하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자신에게 뉴스가 생기면 주변에 모두 알려야 한다. 마음이 괴로워지더라도 상대에게 돌진한다. 저렇게까지 사람들에게 정을 갈구하는 이유가 뭘까. 어떤 계산을 했길래 저렇게 많은 사람을 ‘관리’하며 사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고립되어 사는 것이 편하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도무지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사소한 말다툼이 감정싸움으로 번져 씩씩대는 엄마를 향해 물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굳이 그 사람을 만나야 해? 그냥 절연하면 되잖아.” 화를 삭이지 못한 엄마를 건드렸으니 내게 불똥이 튀었다. “너는 글 쓴다는 애가 절연을 그렇게 쉽게 말하냐? 그럼 넌 사람들이 다 볼 만한 데다 글을 왜 쓰는데? 혼자 일기 써 그냥!”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누군가와 연결되길 원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안부 묻는 것을 어려워하면서도, 세상에 글을 내놓고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러니 고립이 편하다거나 고독을 즐긴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다.
취직, 연애, 결혼, 건강… 안부를 물으며 가볍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연루되는 것을 경계하고, 그들과 친밀한 감정을 나누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가 되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어떤 이야기든 ‘행복’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버려질 바엔 차라리 먼저 연락을 끊는 게 낫겠다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 생각했다.
사회학 연구자인 이승연은 쉽게 ‘절연’을 일삼는 나와 같은 이들을 연구한 책 <손절사회>에서 이런 행동 패턴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 시대가 가진 공통의 문법이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관계에서 도피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신자유주의’라는 문화적 배경을 거론하며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체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와 공공의 책임을 해체하는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이자 문화”라고 말한다.
가까울수록 관계에 드는 에너지,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피로도, 상처받을 가능성, 이 모든 것을 내가 치러야 할 비용처럼 느끼기에 생존 외의 것에 쓸 여력이 없어진 이들에게 사교란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손절’은 하나의 미덕이 되어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는 정리하고,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내 기를 앗아가는 이에게서 벗어나라는 편리한 조언을 양산한다. 나는 그 조언을 충실히 섬기며 에너지가 드는 관계, 갈등이 불편한 관계, 설명이 필요한 관계를 모두 정리한 뒤 사방에 벽을 세우고 홀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고립보다 갈등을 택하던 엄마의 나이에 가까워진 나는, 이제 내가 덜 소모되는 것만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무지에서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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