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수퍼갑’으로, 올해는 ‘파트너 간택’하러 오는 젠슨 황...그가 풀어놓을 보따리는?
2026.06.03 17:20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을 앞두고 국내 산업계가 분주하다. 젠슨 황 CEO의 이번 방한은 APEC 참석차 왔던 작년 10월 이후 7개월 만이다. 현재 세계 테크 업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1년도 안 돼 한국을 두 번 찾는 것은 이례적이다.
테크 업계에선 인공지능(AI)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가운데 젠슨 황의 이번 방한 목적이 7개월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본다. 작년 10월엔 AI 구동에 필수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을 장악한 ‘수퍼 갑’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의 AI용 제조 데이터 확보를 위한 파트너 물색의 목적이 크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젠슨 황의 이번 방한은 작년과 같은 ‘AI 업계 황제로서의 행차’가 아니라 제조 노하우와 데이터를 공유할 한국의 파트너 기업을 ‘간택’하려는 목적이 크다”며 “작년과 비교해 AI를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변하면서 엔비디아가 한국 업체에 함께 하자는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이라고 했다. 황 CEO가 언급하는 한국 기업이나 총수와 면담이 예정된 기업의 주가가 폭등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젠슨 황은 작년 10월 방문해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서울 강남의 치킨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깐부 회동 쇼’를 연출했다. 국내 기업들은 젠슨 황과 관계를 통해 웃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던 엔비디아의 최신 GPU(그래픽 처리 장치)를 한 장이라도 더 받으려 노력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AI 가속기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엔비디아에 자사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납품하려고 뛰었다. 엔비디아가 어느 업체를 낙점하느냐에 따라 세계 D램 반도체 시장 순위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당시 귀국길에 한국에 GPU 26만장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젠슨 황의 이번 방한 목적은 다르다. 작년 GPU 공급망이 한국 기업과 주요 의제였다면, 이번엔 로봇과 자율 주행, 소버린 AI를 포함한 피지컬 AI로 비즈니스 논의가 확대됐다. 젠슨 황이 만나려는 비즈니스 파트너도 달라졌다. 작년엔 HBM을 생산하는 삼성과 SK, 자율 주행과 공장 자율화를 위해 GPU가 필요한 현대차 총수를 만났지만 올해는 이 외에도 구광모 LG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김택진 엔씨 대표도 만난다. 국내 테크 업계에선 “젠슨 황이 절대 갑이라는 공급자 위치에서, 엔비디아 제품을 국내에 팔고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하는 파트너로 위치가 바뀐 것”이라고 했다.
젠슨 황이 국내 업체와 파트너십을 구축하려는 이유는 제조 관련 데이터 확보가 주된 목적이다. 엔비디아는 GPU에선 세계 최강이지만, 최근 젠슨 황이 꾸준히 강조해온 ‘피지컬 AI’ 분야에선 그렇지 않다. 현실을 가상 세계에 복제하는 디지털 트윈 시뮬레이션,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 학습 플랫폼에선 강점이 있지만, 여러 제조 데이터를 기반으로 로봇이 현실을 인식하고 행동하도록 학습시키는 VLA(시각·언어·행동) 모델 측면에선 구글·테슬라·피겨AI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실제 제조 현장에서 쌓인 현실 세계 데이터가 꼭 필요하지만 미국은 제조업 기반이 약하다. 업계 관계자는 “피지컬 AI 분야에서 중국이 엄청난 제조 현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빠르게 추격하고 있어 엔비디아 입장에선 제조업이 강한 한국 기업과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엔비디아는 휴머노이드로 대표되는 피지컬 AI의 제조와 생산은 대만 생태계를 활용하고, 이를 위한 데이터 확보는 한국의 다양한 제조 생태계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한국 업체와 협업해 피지컬 AI 표준을 선점하고, 궁극적으로 한국 제조업을 자사 플랫폼에 ‘락인(Lock-in·가두기)’ 하겠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옴니버스(디지털 트윈), 아이작(로봇), 코스모스(피지컬 AI) 등 자사 플랫폼을 한국 제조업체에 심어 글로벌 업계 표준으로 굳히고, 한국 공장과 로봇 생태계가 엔비디아의 칩과 플랫폼을 사용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지난 1일 젠슨 황이 대만에서 열린 IT 전시회 컴퓨텍스에서 ‘코리아 파트너 나이트’를 열고, “한국은 우리 생태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추켜세운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그만큼 엔비디아의 한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국내 기업들은 엔비디아와 협업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긍정적이다. 다만 기업마다 노림수는 제각각이다. 삼성전자와 SK그룹은 엔비디아와 메모리 공급 협업 강화가 최대 목표다. AI연구원에서 엔비디아와 산업 특화 AI 모델을 공동 개발 중인 LG는 엔비디아와 협업해 가전·전장 중심에서 ‘피지컬 AI 플랫폼’ 기업으로 재평가받겠다는 전략이다. 또 피지컬 AI에 들어가는 LG이노텍의 센서와 기판, LG전자의 데이터센터 냉각 시스템 등을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두산은 건설기계·발전기기·로봇에서 쌓아온 운영 데이터를 엔비디아 피지컬 AI에 학습시켜 ‘두산 맞춤형 모델’을 확보하려 한다. 전력부터 AI 서버 기판 소재, 로봇까지 3중으로 엔비디아 생태계에 올라타려는 것이다. 작년 엔비디아에서 삼성·SK·현대차보다 많은 GPU 6만장을 받은 네이버는 피지컬 AI 플랫폼을 공동 개발하며 몸집을 키우길 원한다. 네이버클라우드에 엔비디아 GPU를 추가 확보하고, 피지컬 AI를 넘어 국방 AI까지 개발하겠다는 전략이다. 젠슨 황은 8일 경기도 성남 분당에 있는 네이버 사옥을 직접 방문할 계획이다.
젠슨 황과 만남을 예정한 기업은 이미 주가가 급등하는 ‘젠슨 황 랠리’가 벌어지고 있다. 테크 업계는 파트너를 찾으러 온 젠슨 황이 ‘얼마짜리 어떤 선물’을 내놓을지 주목한다. 최근 젠슨 황은 대만에서 엔비디아의 연간 지출을 1500억달러(약 229조원)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또 지난 1일엔 “항상 한국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해 국내 산업계가 거는 기대도 크다. 업계 관계자는 “젠슨 황의 이번 방한이 작년 깐부 회동처럼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투자 규모가 나오고 국내 기업과 실질적 협력 관계를 맺는 식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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