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전
[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분양받은 집, 선택권 없는 풍경
2026.06.03 17:15
아파트 단지 공공조형의 불편한 진실
내 돈으로 만든 공간, 내 의견은 없어
함께 오가는 곳이라면 함께 결정해야
공동의 공간에 참여의 자리를 만들라
내 돈으로 만든 공간, 내 의견은 없어
함께 오가는 곳이라면 함께 결정해야
공동의 공간에 참여의 자리를 만들라
나의 것, 너의 것, 모두의 것. 우리는 대개 소유로 공간을 구분한다. 그러나 실상, ‘나의 것’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집 앞 공원이나 가로수가 그렇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상당 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 벽지 색상, 가구 배치, 식물 하나까지도 몇 군데를 비교하고 한참을 고심한다. 오래오래, 매일 보고 누릴 것이니까.
복도, 엘리베이터, 단지 광장 같은 공유 공간. 그 공간들에 ‘나의 의사’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다. 도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공공 공간은 단순히 스쳐 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머무는 장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 전, 어느 1군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 광장에서 미러 처리된 스테인리스 조형물을 보았다. 안내판에는 작품명, 재료, 규격, 작가명, 그리고 현학적인 설명이 적혀 있었다. 조형물을 보고, 안내판을 읽고, 다시 조형물을 봐도 왜 그 작품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을 여기 두기로 결정한 순간에,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알 수 있었을까. 공공미술 비평가 루시 리파드는 예술가가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감각, 경험을 먼저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비로소 그 공간에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좋은 공공미술의 목표는 사람들이 자신이 있는 곳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조형물도 그러했을까. 그저 이름만 다른 수많은 단지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오브제 중 하나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미술작품 설치를 의무화한다. 공공 공간에 예술을 들여 시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히기 위함이다. 그 비용은 분양가에 포함된 것으로 입주민이 부담한다. 그러나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 입주민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는 없다. 시행사가 에이전트를 통해 작가를 선정하고, 행정기관에 심의를 신청해 통과되면 설치된다. 입주민은 그저 분양받은 자신의 동호수에 입주만 하면 된다. 내 돈을 내고 산 아파트지만, 내가 고르지 않은 풍경이 사는 내내 내 일상의 배경이 된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매일 아침 그 앞을 지나쳐야 하고, 심지어 작품의 유지보수비도 내가 낸 관리비에서 나간다. 하자보수 기간 2년이 지나면 작가 측의 책임은 끝난다.
한국은 세계에서 아파트 거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아파트는 집과 놀이터, 산책로와 광장이 하나의 생활권 안에 묶인 작은 도시라 할 수 있다. 그 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은 여전히 주민이 참여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결정된다.
공간은 생각보다 사람을 많이 바꾼다. 매일 지나치는 풍경은 조금씩 우리의 감각을 만들고, 그 감각은 다시 삶의 질이 된다. 도시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공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느냐가 그 장소에 대한 애착과 공동체 의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간도 우리를 만든다. 그 공간에 무엇이 놓이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조경은 다르다. 봄이면 새 꽃이 심기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어지며, 가을이면 색이 바뀐다. 자연은 매년 살아있는 변화를 선물한다. 반면 광장의 조형물은 박제된 듯 처음 그 자리에,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멈춰 있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표면에 때가 끼고, 복잡한 패턴 안에 먼지가 쌓이고, 빛나던 마감이 조금씩 흐려진다는 것이다.
어느 아파트 단지나 비슷한 작품들이 보인다. 미러 처리된 스테인리스 곡면, 분자 구조처럼 연결된 금속 구들, 레이스 패턴으로 타공된 나무 형상. 색과 이름이 다를 뿐, 유사하다. 작품 설명서에는 어느 단지에 갖다 놓아도 틀리지 않는 ‘성장, 생명, 희망, 순환’ 같은 콘셉트가 등장한다. 그곳만의 이야기, 그 광장만의 맥락, 거기 살 사람들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돌려보면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세계의 도시들이 보인다. 미국 일부 도시에서는 전문 패널이 후보작을 추린 뒤 최종 선택을 주민 투표에 부친다. 물론 완벽한 해법은 아니다. 입주민이 모든 예술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과정 어딘가에, 여기 살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번쯤 들어갈 자리가 존재해야 한다. 분양이 끝나면 누가 살지 이미 정해진다. 그 사람들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보여주고 의견을 묻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현관문 밖은 내 공간이 아니라고,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그것을 도시권이라고 불렀다. 도시 공간을 사용하고 향유하고 그 형성에 참여할 권리. 르페브르는 도시가 거기 사는 모든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공공재인데, 점점 소수에 의해 기획되고 소비되는 상품으로 변해간다고 경고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경고는 낯설지 않다. 단지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 앞에 그 말이 다시 떠오른다.
공공이라는 말은 누구의 공간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모두의 공간이라는 것은 나의 몫도 있다는 말이다. 복도도, 광장도, 그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조형물도. 사실 이것은 조형물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광장의 벤치가 어디에 놓일지, 어떤 나무를 심을지,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문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성이 ‘참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도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발 딛고 있는 일상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보내는 삶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제 현관문 밖의 세계에도 조금 더 우리의 지분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한 입주민이 조형물 앞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금속 표면에 그의 모습이 잠시 희미하게 비쳤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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