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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평강 감독 “난 성공한 덕후, 한국 애니도 성공하려면…”

2026.06.03 15:58

김초엽 원작 애니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3일 개봉
애니메이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연출한 허평강 감독. 영화특별시SMC 제공

“제가 말 그대로 ‘성덕’(성공한 덕후)이에요.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본 ‘명탐정 코난’을 연출(2018)했을 때 ‘나 정말 성덕이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라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한복판에서 20년간 일해온 허평강(44) 감독이 한국에서 데뷔했다. 3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총연출을 맡았다. ‘순례자들은…’은 40만부 넘게 팔린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동명 단편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돼 21스튜디오(제작사)의 제안을 받았아요. 소설집 수록작 4편을 추천받았는데, 그중 이 작품이 제가 하려는 2디(D) 작화에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여성 주인공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좋았고요.”

2019년부터 대본 작업을 시작했다. 본래 30분짜리 중편으로 기획됐지만 한정된 예산 안에서 60분으로 늘려 공간 디테일과 등장인물들의 감정 서사를 더 풍부하게 담아냈다.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로 일컬어지며 오는 21일 개막하는 제50회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도 받았다.

애니메이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영화특별시SMC 제공

한국 애니메이션이 일본과 할리우드의 하청 수준에 머물던 2001년 성균관대 영상학과에 입학한 허 감독은 동기 가운데 유일하게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교환학생으로 일본 와세다대에 가서도 애니메이션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졸업을 앞두고 진로가 막막했는데 교환학생 때 알던 일본 친구에게 정보를 구해 일본에 취업하게 됐죠.” 그렇게 얻은 허 감독의 첫 직장은 거장 감독들의 성지라 불리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매드하우스였다.

이후 여러 스튜디오를 거치면서 스토리보드 작가와 연출자로 경력을 쌓아갔다. ‘데스노트’, ‘명탐정 코난’, ‘하이큐!! 투 더 탑’,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일본 침몰 2020’ 등 40여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함께 작업했던 스타 감독도 여럿인데, 그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공동 연출했던 유아사 마사아키에게 특히 많은 걸 배웠다고 했다. “‘너만의 연출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을 내게 보여달라’는 말이 제 도전 정신을 자극했어요. 발버둥 친 흔적 자체는 아름답지 않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거든요.”

애니메이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영화특별시SMC 제공

‘순례자들은…’은 이후 그가 갖게 된 철학이 잘 녹아든 작품이다. 슬픔도 고통도 없는 유토피아와, 불안과 고통이 있지만 사랑이 존재하는 행성 사이에서 기꺼이 고통을 끌어안는 사람들의 여정을 그린 문학적 서정성에 담백하고 수수한 그림체를 얹었다. 6등신에 가까운 캐릭터들은 8등신, 9등신의 화려한 캐릭터들이 자리 잡은 요즘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전선에서 비켜난 스타일이다.

그는 “누구한테도 비판받지 않는 매끈하고 날렵한 공을 만들 수도 있지만, 투덕투덕한 진흙공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결핍이 있듯이 영화 속 캐릭터들도 각자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어요. 완벽하지 않으면서 볼수록 예쁘다는 마음이 드는 얼굴을 그리고 싶었죠.” 이를 위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인사이드 아웃 2’ 등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위현송 캐릭터 디자이너와 협업했고, 밴드 새소년의 황소윤이 처음으로 영화 음악감독을 맡아 작품의 개성과 완성도를 높였다.

애니메이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영화특별시SMC 제공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거대 자본과 꽉 짜인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판인 데 비해 한국은 아직 작가의 자유가 많이 발휘되는 게 장점이라고 짚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은 조금의 여지도 찾기 힘들 정도로 산업적으로 꽉 짜여 있어요. 여러 분야의 업체들로 제작위원회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야기나 제작 방향이 사실상 결정되죠. 그렇기 때문에 한해 400편이나 되는 작품이 나올 수 있고, 그중 큰 성공작도 나올 수 있고요.”

일본 애니메이션이 도약한 밑바탕에는 데즈카 오사무, 미야자키 하야오, 안노 히데아키,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 같은 천재 감독들의 계보가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국도 애니메이션이 승산 있는 판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실사 영화나 드라마에 몰리던 비상한 재능들이 애니메이션으로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편의 실패에 흔들리지 않는 꾸준한 투자와 제작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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