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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값 1510원에도 정부가 느긋한 이유… “반도체 호황이 환율 공포 눌렀다?”

2026.06.02 16:36

외국인 110조 수익실현, 환전이 주원인
과거와 다른 기초체력에 위기론은 실종
순대외금융자산 7535억 달러 역대급
GDP 절반 수준 외화 방어막 확보

비(非)반도체 기업들 구매력 약화 고통
호황 종료땐 물가 폭탄으로 전이 가능성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연간 상승률이 3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동결이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되자 원·달러 환율이 상승 출발했다. 미국 인플레이션 재가속 우려에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달러 강세 압력이 커진 영향이다.

13일 서울 중구 명동 일대 환전소 전광판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2026.05.13. kch0523@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고환율은 곧 경제위기’라는 공식에 금이 가고 있다. 달러당 원화값이 1510원 선까지 밀렸지만 시장에서는 위기론 대신 반도체 중심의 경기 호황 국면에 진입했다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원화값 하락을 대외 신인도 하락의 전조로 해석하던 과거의 문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양상이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두 달 내로 환율이 1400원대로 하향 안정화될 것”이라며 강력한 안정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고환율·고물가·고금리는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과거와 같은 시장 개입 대신 고환율을 ‘구조적 전환기의 필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론의 전제 조건인 ‘반도체 호황’이 꺾일 경우, 고환율은 언제든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 위기에서 오는 원화 하락이 아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한국 주식시장이 3배 정도 올라서 외국인 보유주식 평가이익이 3배 올랐고, 그래서 외국인이 비중을 조정하느라 상반기에만 110조원을 팔았다”며 “팔아서 환전하다 보니 달러 수요가 증가했고, 그래서 일시적으로 외환시장이 1500원을 넘어선 상황”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특정 국가 주식 비중이 단기간에 커지면 이를 비중에 맞추는 리밸런싱이 필요하다. 외환당국 고위 관계자는 “과거엔 경제위기발 자본유출 우려가 환율을 상승시켰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증시 급등 이후 외국인의 기술적 리밸런싱이 환율 상승의 주요 원인”이라며 “원인이 다르다 보니 대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외환 당국은 과거 일본 선례를 참고하고 있다. 일본도 재정·통화 확장정책인 이른바 아베노믹스가 시행된 2012년~2015년까지 닛케이지수가 약 2.5배 상승했는데, 해당 기간 달러당 엔화값이 80엔대에서 120엔대까지 하락한 바 있다. 코스피 상승 기조가 계속 지속되는 한 1500원대 고환율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와 관련 외환당국이 변동성 관리에 주력하는 이유다.

◆ 순대외자산국으로 바뀌었다

2008년만 하더라도 한국은 외화부채에 취약했다. 예를 들어 달러당 원화값이 1000원에서 1200원으로 하락하면, 100억원이면 갚을 수 있던 외화부채가 원화 기준으로 120억원으로 는다. 기업의 외화부채 상환 부담으로 연결되고 다시 경제위기론으로 불거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국은 2014년 이후 순대외금융자산이 ‘흑자국’으로 전환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순대외금융자산이 645억달러 적자였고, 당시 달러 표시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는 5893억달러에 불과했다. 외화빚이 무려 GDP의 10%를 넘는 시기였다. 하지만 올해 1분기 기준 순대외금융자산은 7535억달러 흑자에 달한다. 한국의 2025년 명목 GDP 1억8726억달러의 절반가량이 순대외금융자산인 셈이다.

더욱이 경상수지 흑자도 최근 반도체 호황 덕분에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책 방향도 달라졌다. 2010년 도입된 선물환포지션 한도, 외환건전성 부담금,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등 이른바 외환건전성 3종 세트는 외국자금의 과도한 유입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한 외환당국 관계자는 “2010년대 초반엔 외국자금이 들어왔다가 위기 때 대거 빠져나가 원화 약세가 급격히 진행될까 봐 우려해서 외화 유입을 막았다”면서 “하지만 현재는 대외순자산국이 됐기 때문에, 위와 같은 우려가 많이 불식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과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지수 편입 추진을 통해 외국인 자금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수비적 외환정책에서 보다 공격적인 자본시장 개방 정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

물가는 부담이다. 고환율로 원화표시 수입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국내 물가가 오른다. 다만 최근에는 환율 상승이 과거처럼 곧바로 국내 물가 전반으로 확산하는 구조가 약해졌다는 평가가 있다.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한국 제품의 국제 경쟁력이 약해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국내에서 부담하는 측면이 컸다면, 이제는 수입 원자재에 부가가치를 더해 해외로 수출하는 비중이 커졌다”며 “고환율에 따른 비용 부담을 수출 물품 가격에 반영할 수 있게 되면서 환율이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약해졌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최근 보고서에서 원화값 하락이 단기적으로 소비자 물가에 상방 압력으로 작용하지만, 그 지속성과 파급력은 국내 수요·공급 요인보다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역대 고환율 시기를 보면, 수입 물가 상승률이 항상 수출 물가 상승률을 앞질러 왔다. 하지만 올해 4월 기준 수출 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40.8%로, 수입 물가 상승률(20.2%)의 2배를 기록했다.

◆ 고환율 지속은 물가 부담

문제는 원화값 하락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여부다. 당장 원자재를 수입하는 많은 기업들의 이윤이 감소하고, 달러로 사들어야 하는 건에 대해선 구매력이 악화되는 부작용이 있다. 또 반도체 호황발 ‘수출 대박’이 국내로 전이될 인플레이션을 일부 해외로 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반도체 호황이 내년 말 이후 이어지지 않을 경우엔 물가 상승 압력은 커질 수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후보자 시절에 첫 출근길에서 “환율 레벨보다 달러 유동성 여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올해 2390억달러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는 만큼, 외화 시장에 유동성은 풍부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신 총재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귀국해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을 역임하며 ‘거시건전성 3종 세트’를 만든 바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외환당국 수장인 신 총재가 가격보다는 물량이 더 중요하다고 밝힌 것”이라며 “당분간 고환율은 지속될 전망이다. 신 총재의 그간 논문을 돌이켜볼 때, 신 총재는 금리를 완만하게 인상시키면서, 환율 변동폭을 줄이고 외화 유동성이 메마르지 않게끔 거시건전성 관리를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당국, 경계감은 여전

시장에서는 당국이 1520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민혁 국민은행 연구원은 “이날도 환율이 1520원 부근에서 막히는 흐름이 나타났고, 지난번 한국은행과 외환당국의 구두개입도 비교적 강하게 나왔다”고 말했다.

다만 경계감이 덜한 것은 1500원 안팎의 ‘고환율’ 흐름이 장기간 이어졌기 때문이란 관측이 나온다. 유가 상승과 달러 강세가 계속 이어져 오다 보니 시장이 어느 정도 원화 약세에 익숙해진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향후 원화값에 영향을 미칠 가장 큰 변수로는 외국인의 국내 증시 순매도 흐름이 꼽힌다. 이 연구원은 “외국인 한국 주식 비중이 높아진 상황이라 리밸런싱이나 차익실현성 주식 매도 물량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며 “수급 측면에서 부담 요인이 될 수 있어 원화값 하락 변동성이 자주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효과가 시장 기대만큼 크지 않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WGBI 자금은 일시에 들어오는 구조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분산 유입된다”며 “또 국내 채권시장에 들어오는 해외 자금 가운데 상당수가 중앙은행 등 장기 투자 성격의 자금인데, 이들은 대부분 환 헤지를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실제 외환시장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중장기적으로 원화값이 다시 1400원대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서정훈 하나은행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원화값 하락은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미국 국채금리 상승 등 중동 전쟁 영향이 큰 만큼, 전쟁이 종결된다면 원화값도 다시 1400원대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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