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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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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치

2026.06.02 00:43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선거 유세용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지난 며칠 내내 들었다. 이번 우리 동네 출마자가 선택한 곡은 한 애니메이션의 오프닝 곡이었던 ‘질풍가도’다. 운명, 굴하지 않는 용기, 희망 같은 단어와 벅찬 사운드가 어우러져 마치 선거 유세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처럼 현장에 잘 붙는다.

아파트 우편함에는 집집마다 배달된 선거 공보물이 혓바닥처럼 길게 삐져나와 꽂혀 있다. 공보물을 들춰 보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당선되던 해, 나는 서울 변두리 여자 중학교 전교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학생회장 직선제가 처음 도입된 해였다.

피켓 두 개를 들어주는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돌면서 짧은 연설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었다. 공약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말로 하면 ‘유세뽕’에 취해 그저 신나게 학교를 누볐던 것 같다. 결과는 뜻밖에도 학교 측이 은근히 밀던 모범생 후보를 제친 나의 당선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고, 이제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판단과 지성을 보완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선거 풍경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원색 점퍼로 당을 구분하고, 며칠 동안 귀에 꽂히는 선거송을 반복하며, 무조건 뽑아달라는 외침을 이어간다. 트럭 위에서 허리를 숙이고, 거리에서 악수를 반복하는 익숙한 장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유권자들이 듣고 싶은 것은 더 이상 그런 흥겨운 구호만은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이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최적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시대일수록, 정치인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뇌와 책임감이다. 누군가의 삶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았는지, 어떤 미래를 만들고 싶은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진솔한 설명 말이다. 질풍 같은 용기는 어쩌면 거대한 스피커의 볼륨이 아니라, 유권자의 삶 가까이에서 오래 고민한 흔적 속에서 비로소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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