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자동차 명장은 배기구에 손만 대도 안다… AI가 명장의 '노하우' 따라잡을 수 있을까
2026.06.01 04:31
숙련 인력 노하우 끊기는 제조현장 위기
경쟁력 유지 위해 AI에 학습시키는 시도
명장들 "미래 두렵지만, 결국 해야 할 일
기술의 깊이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간다"
"같은 색을 띠더라도 표면에 떠 있는 거품 모양에 따라 쇳물 상태가 다 다릅니다."
여느 사람들에겐 모두 비슷해 보이는 쇳물도 37년간 용광로를 지킨 김보현(59)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기장의 눈엔 달리 보인다. 거품이 퍼지는 방식이나 미세한 점성 차이처럼 장비로 측정되지 않는 변화를 그는 단번에 알아챈다. 김 기장은 "온도나 성분 변화를 일일이 계측하지 않고도 오랜 경험으로 판단해 업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눈썰미와 노하우를 '암묵지'라고 부른다.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인 이 지식은 몸이 기억하지만 설명하긴 어렵다. 암묵지를 보유한 숙련 인력들의 직관과 판단력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역량이다. 정부나 기업은 이들을 '명장'으로 공인하기도 한다. 김 기장은 고용노동부가 선정한 금속재료 명장이다.
문제는 인구 감소와 제조업 기피로 명장의 노하우가 체계적으로 전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제조업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에 정부가 제조업 암묵지를 데이터화하기로 했다. 산업통상부는 올해 480억 원을 투입해 숙련 인력들의 노하우를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로 정제하는 작업을 지원한다.
한국일보가 취재한 철강·조선·자동차·전선·바이오 명장들은 노하우를 이어가자는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AI가 손끝 감각과 순간적 판단을 재현할 수 있을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진 못했다. 그래도 AI 전문가들은 "방법이 없진 않다"고 했다.
수치 데이터 없다면... 맥락과 판단 구조화로 가능
명장의 기술 중 구조화가 가능한 건 어렵지 않게 AI에 전수할 수 있다. LS전선에서 30년 넘게 해저 케이블 절연 공정을 맡아온 이중렬(55) 동해공장 반장은 "온도나 압력 같은 조건은 실시간 기록되는데, AI가 이를 분석하면 특정 조건에서 불량이 생기는 패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현장에선 구조화가 안 되는 작업투성이다. 대웅제약 바이오 공정에서 약품을 무균 상태로 밀봉하는 일을 7년째 맡고 있는 주성하(32)씨는 "공정 시작 때마다 볼트를 조여야 하는데, 기계가 예민해서 너무 세도 너무 느슨해도 안 된다. 이때 전적으로 손 감각에 의존한다"고 했다. 딱 떨어지는 수치나 데이터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AI 전문가들은 이럴 땐 명장 판단을 뒷받침하는 '맥락과 과정'을 구조화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공정 상태와 작업 이력을 함께 기록해 '상황-판단-결과'로 이어지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AI에 학습시켜 확률 패턴을 찾아내는 식으로 암묵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예상이다. 김준하 광주과학기술원(GIST) AI정책전략대학원장은 "특정 상황에서 어떤 맥락을 근거로 판단했는지를 구조화하면 명장처럼 생각하는 AI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오감 총동원하는데... 섬세한 감각 재현은 어려워
명장들에겐 남다른 '감각 능력'이 있다. 특히 서로 다른 감각을 동시에 느끼고 종합해 설비 상태를 판단하는 능력은 독보적이다. 56년간 자동차 정비를 해온 박병일(70) 카123텍 대표는 "배기구(머플러) 근처에 손을 대고 온도와 진동을 느끼면서 상태를 진단한다"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감각 조합을 AI가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또 자동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 주행 조건에 따라 고장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 숙련 정비공은 가속 중인지, 언덕을 오르는 부하 상태인지 등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린다. 박 대표는 "여러 단서를 이어 붙여 맥락을 추론하는데, 이를 데이터로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고용노동부가 선정한 자동차 명장이다.
AI 전문가들도 숙련 인력의 섬세한 오감을 AI에 그대로 옮기는 건 현재 수준으론 어렵다고 인정했다. 시각은 고해상도 영상과 라이다 센서로 눈이 보지 못하는 정보까지 수집할 수 있지만, 촉각은 사람보다 감지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윤석준 포스코DX 로봇센터장은 "사람 손엔 1㎠ 당 감각 수용체가 200개 이상 존재해 매우 민감한데, 로봇엔 (감각 센서가) 절반도 못 들어간다"며 "'평소와 다르다'는 감각을 데이터화하긴 어렵다"고 짚었다.
그래도 향후 정밀 센서가 확보된다면 해볼 만하다. 엄윤설 에이로봇 대표는 "숙련 인력 역시 여러 입력(감각 정보)을 바탕으로 출력(행동, 판단)을 낸다"면서 "감각기관에 대응하는 센서 정밀도와 연산 능력이 향상된다면 AI 역시 명장처럼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드물게 생기는 문제 해결은... 월드모델로 대비
AI에 가장 어려운 상황은 처음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더구나 설비 고장이나 오작동은 평소 발생 빈도가 낮은 데다 유형도 천차만별이다. 42년간 조선소 설비를 다뤄온 유동성(59) HD현대삼호 설비보전부 외업정비팀장은 "골리앗 크레인이나 선박 이송 장비 같은 대형 설비는 사고 사례가 많지 않아 데이터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용노동부 선정 기계정비 명장이다.
테크업계에선 유 팀장이 지적한 한계를 보완할 기술로 월드모델을 주목한다. 월드모델은 AI가 현실 세상의 물리법칙이나 인과관계, 공간구조 등을 스스로 학습하고 가상 환경에서 실제 상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만든 모델이다. 가상 공간을 구현한 디지털 트윈에 원리를 이해하고 예측과 판단을 모의실험하는 기술이 더해진 것이다. 최근 미국 엔비디아가 자체 월드모델 '코스모스'를 내놓은 것도 제조업 AI 전환을 겨냥한 행보로 분석된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자 산업 경쟁력 문제"
명장과 AI 전문가 모두 제조 현장의 암묵지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을 미룰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숙련 인력이 설 자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김 기장은 그래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우리가 안 하면 다른 나라들이 먼저 할 것"이라며 "산업 경쟁력 문제인 만큼 손 놓고 있을 순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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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된 선배들이 AI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요즘 현장에서도 고민이 많다고 명장들은 입을 모았다. 박 대표는 "AI도 결국 숙련자들의 경험을 배워 자라지 않나"라며 "기술의 깊이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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