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곱 암자를 돌며, 일곱 마음을 돌아보다
2026.05.31 08:02
석달 기다림 끝에 열린 산의 문
부처님오신날 7개 산중암자 순례
도솔암에선 기쁨…영원사에선 분노
칠정 곱씹고 나니 사랑이 남더라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이면 산은 메말랐던 갈잎을 떨구고 빈 가지마다 눈부신 신록을 피워 올리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자연이 스스로 차오르기까지 인간이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다. 2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국립공원 봄철 산불방지 기간이다. 이 기간엔 입산이 금지된다. 서둘러 산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 눌러두어야 한다.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지난 15일, 굳게 닫혀 있던 산의 문이 열렸다. 영혼의 산,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이 열리면 단연 화대종주를 하려고 했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지리산 주 능선을 잇는 대표 산행 코스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일본 후지산 100마일 경기에 출전한 데 이어, 한주 전 강릉에서 열린 100㎞ 트레일러닝 대회를 완주하고 나니 몸과 마음에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산이 시간을 가지고 차오르는 것처럼 나 역시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화대종주는 다음으로 미루고 지리산의 다른 길을 떠올렸다. 뱀사골, 중산리, 백무동 등 14년 만에 서북 능선을 다시 걸어볼까, 여유롭게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던 중 돌연 떠오른 곳이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었다.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서북부 삼정산 능선을 따라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 등 일곱개 산중암자를 잇는 길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창건되고 중창된 유서 깊은 수행 도량들이다. 지리산에 갈 때마다 목표는 늘 해발 1915m 천왕봉이었기에 다른 길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가오는 주말은 초파일이었다. 부처님오신날에 지리산의 일곱개 산중암자를 순례한다면 그 자체로 특별한 산행이 될 것 같았다.
산악회 버스를 타고 칠암자 순례길 들머리인 음정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24일 새벽 3시30분. 백두대간 벽소령을 알리는 표지석이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났다. 도로변 공터에서 산행 준비를 했다. 전국에서 온 크고 작은 산악회 차들도 속속 도착했다. 모두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불심과 산을 향한 마음은 묘하게 닮아 있다. 간절함이다. 현재에 머물며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희망을 품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인생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 석가모니처럼 말이다.
헤드램프의 빛을 밝히며 벽소령 탐방로를 걸었다. 풀벌레와 검은등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리산의 선선한 바람 속을 걷다 보니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향하던 길이 겹쳐졌다. 헤드램프를 끄고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칠흑 같던 어둠이 잠시 주춤하더니 사라지고 이내 푸른빛으로 옅어진 하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5살, 첫 산으로 지리산에 오르던 여름날 바라봤던 그 하늘이었다. 있는 줄도 모르고 까맣게 잊고 살았던 시간은 때로 이렇게 난데없이 불쑥 눈앞에 나타나 기억의 경계를 허문다.
칠암자 가운데 첫번째 산중암자인 도솔암에 가까워지자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여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앞뒤로 줄지어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씩 빨라졌다.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일부 탐방로는 국립공원 통제 정책에 따라 비정기적으로 출입이 제한된다. 하지만 국립공원 개방 직후, 가을 단풍철, 그리고 칠암자 순례 시즌인 부처님오신날 전후에는 특별히 개방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이날도 다행히 영원사를 통해 우회하지 않고 도솔암으로 곧장 향할 수 있었다.
새벽 5시20분, 일출과 동시에 도솔암에 도착했다. 해가 떠오르는 찰나의 장면은 간발의 차이로 놓쳤으나 기대하지 않았던 또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해였다. 붉게 물든 구름바다 한가운데 지리산 봉우리가 섬처럼 떠 있었다. 또 한번 오래된 기억이 밀려왔다. ‘그래, 이게 지리산이지. 여기가 지리산이지.’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남은 여섯개 산중암자는 어떤 모습일까. 붉은 해가 사라질 때까지 도솔암 석탑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일곱개의 산중암자를 순례하면서 나는 나 자신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내 안에 있는 일곱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칠정(七情)은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을 말한다.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 한곳의 산중암자에 들를 때마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며 오롯이 한가지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도솔암에서는 기쁨에 대해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산을 오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더욱이 미지의 산을 오르는 행위 안에 나의 정체성이 있었다.
두번째 산중암자인 영원사에서는 분노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화나게 하는 모든 것들. 처음에는 사소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무례한 것, 선을 넘는 것, 거짓된 것, 가식적인 것, 자신의 이해로 타인의 말과 행동을 쉽게 재단하는 것, 허영과 탐욕 등. 생각만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바닥에 자세를 낮추고 기도하자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중요한가. 머지않아 다시 화를 낼 것이다. 일상 속에 부대끼다 보면 분명 같은 감정에 휩쓸릴 것이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평온했다.
절에서 절로 이동하다 보니 3년 전 후지산 정상으로 향하던 길이 떠올랐다. 한손에 지팡이를 짚고 1합목에서 10합목까지 오르던 길 역시 지금처럼 마음을 돌아보는 순례의 여정이었다. 세번째 산중암자인 상무주암에 도착해서는 배낭을 내려놓고 1㎞ 남짓 떨어진 해발 1182m의 삼정산 정상에 올랐다. 암자의 스님들은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에게 커피믹스와 초코파이를 보시했다. 평소에는 있어도 잘 먹지 않던 커피믹스와 초코파이가 이날 유난히 맛있었다.
칠암자 순례길은 이름만 들었을 때는 매우 평화로운 산책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착각이었다. 일곱개 산중암자가 자리한 곳은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였고 대체로 해발 900m에서 1000m를 훌쩍 넘겼다. 총거리 또한 20㎞에 달했다. 수행 길인데 쉬울 리 없었다. 상무주암에서는 슬픔에 대해, 문수암에서는 두려움에 대해, 삼불사에서는 사랑에 대해, 약수암에서는 미움에 대해 생각했다. 슬픔과 두려움과 미움의 기저에는 상실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오래 함께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자연스럽게 지금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있다면 슬픔도, 두려움도, 미움도 견뎌낼 수 있었다. 내 안의 사랑이 차고 넘쳐 이 모든 마음을 감싸안기를 바랐다. 해탈이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런 소박한 바람일 것이다. 높고 깊은 산중에서 내려와 들판 한가운데 세워진 실상사에 도착하자 비빔밥 공양이 한창이었다. 오가는 길손 누구 하나 차별하지 않고 품어주는 마음이 비빔밥에 녹아 있었다. 지리산의 사랑을 느꼈다. 칠암자의 마지막인 실상사 대웅전에 엎드리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문득 이 세상에 용서를 구하고 싶어졌다.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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