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는 끝이 아닌 시작…한국 축구,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와이파일]
2026.05.31 09:14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재임 기간 13년. 4번의 선거, 4번의 당선, 그 긴 세월 동안 한국 축구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팬들은 분노했고, 전문가들은 경고했으며, 현장의 목소리는 묵살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끝난 것 같지 않습니다.
사퇴 선언을 보고 가장 먼저 고개를 갸웃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시점입니다. 정몽규 회장은 "월드컵 종료 직후"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지금 당장이 아닌가. 이 질문에 협회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대신 대중은 가설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냈습니다. 이번 월드컵 성적이 좋으면 명예로운 퇴진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적이 나쁘면 모든 화살을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에게 돌리면 그만입니다. 어느 쪽이든 협회장 본인은 빠져나갈 구멍이 생깁니다. "물러날 거면 당장 물러나지, 왜 끝나고 물러난다는 거야"라는 팬들의 냉소를 단순한 감정 폭발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13년간 정몽규 체제가 보여준 행태에 대한 학습된 불신입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퇴 결정이 자발적 결단이냐는 점입니다. 복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사퇴 발표는 정부의 제재 압박이 임계점에 달한 시점과 맞물립니다. 스스로 내린 결단이 아니라, 사면초가에 몰린 끝에 마지못해 선택한 출구 전략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진정성 있는 용퇴와 코너에 몰린 퇴각은 겉모습이 같아 보여도 본질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반드시 이후의 행보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
이번 사퇴 발표 과정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홍명보 감독의 반응입니다.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사령탑이 협회장의 사퇴 소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굉장히 당황했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개인적 소회가 아닙니다. 축구협회 수뇌부의 의사결정 구조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독단적으로 운영되어 왔는지를 스스로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협회장과 대표팀 감독의 관계는 축구 조직 안에서 가장 긴밀해야 할 파트너십입니다. 국가대표팀의 방향성, 선수 선발 철학, 전술적 비전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파트너가 협회장의 거취를 뉴스로 확인했습니다. 소통의 실패를 넘어 소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돌이켜보면 홍명보 감독의 선임 과정부터 이미 불통의 씨앗은 심어져 있었습니다. 절차적 정당성 논란, 기술위원회 무력화 의혹, 밀실 결정이라는 비판이 선임 초기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습니다. 출발 자체가 비틀려 있었던 것입니다. 행정 시스템이 마비된 상태에서 월드컵을 준비해야 하는 대표팀의 현실은, 그래서 더욱 처참하게 느껴집니다.
진짜 적은 따로 있다.
정몽규 회장이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국 축구는 나아질까요?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이미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한 조직에서 한 사람이 13년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시스템이 있고, 시스템을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몽규 회장이 4선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매번 선거에서 8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표를 던진 것은 축구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합니다. 13년간의 폐해를 한탄하면서도 매번 같은 인물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준 이들의 책임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왜 그렇게 했는가. 이해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협회의 지원, 사업, 네트워크, 인사, 권력 주변에는 항상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구조가 해체되지 않는 한, 누가 회장 자리에 앉든 결국 같은 게임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이 순간 권력 공백을 노리며 움직이는 세력들입니다. 정 회장의 등 뒤에서 이미 차기 회장 후보군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정 회장 본인이 '아바타'를 내세워 배후에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입니다. 인물이 바뀌어도 구조가 그대로라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세습입니다. 사퇴라는 장막 뒤에서 또 다른 기득권이 조용히 자리를 잡으려 한다면, 지금보다 더 정교한 감시의 눈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모든 개혁 논의가 결국 귀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인물이 아닌 시스템입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의 구조적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연임 제한 규정이 사실상 무력화되어 있습니다. 규정상 회장 임기는 4년이며 원칙적으로 1회에 한해 연임, 즉 최대 8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3연임부터는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예외 승인을 받으면 횟수 제한 없이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예외 심의가 사실상 통과 의례처럼 운영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정몽규 회장은 예외 조항을 활용해 3연임과 4연임에 잇달아 성공했습니다. 규정은 있었지만, 규정을 무력화하는 또 다른 규정이 장기 집권의 문을 활짝 열어준 셈입니다.
둘째, 선출 방식이 폐쇄적입니다. 일반 팬이나 국민은 협회장 선출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소수의 투표권자들이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기득권 재생산을 낳습니다.
셋째, 책임 구조가 없습니다. 성적이 나빠도, 행정이 엉망이 되어도, 수장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독일, 일본, 스페인 등 축구 선진국들의 협회 거버넌스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투명한 선출 절차, 명확한 임기 제한, 그리고 독립적인 감사 시스템입니다. 특히 일본은 2000년대 초반 협회 개혁을 통해 기술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감독 선임 과정을 체계화했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일본 축구입니다. 우리가 경기장에서 일본을 따라잡으려 할 때, 정작 행정 시스템에서는 20년 전의 일본보다 뒤처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외 심의 제도의 폐지 혹은 실질적 강화는 최소한의 출발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협회장 후보의 공개 검증 시스템, 주요 의사결정의 투명한 공개, 팬과 시민 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감시 채널,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된 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 추궁 메커니즘이 함께 갖춰져야 합니다. 인물 하나를 갈아치우는 것은 증상을 치료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병의 뿌리는 시스템 안에 있습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한국 축구의 주인이 누구인가. 협회 관료들인가, 투표권을 쥔 축구인들인가, 아니면 매 경기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수천만 팬들인가.
현행 구조에서 팬은 소비자일 뿐입니다. 협회의 의사결정에 개입할 공식적인 통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 여론의 힘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정부가 제재에 나선 배경에도, 협회가 끝내 사퇴 카드를 꺼내 든 배경에도 들끓는 민심이 있었습니다. 팬들의 분노가 변화의 마중물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에너지를 조직화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흩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협회 선출 과정에 대한 제도적 개방성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차기 회장 후보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선출되는지를 끝까지 추적하고 감시하는 것. 그것이 지금 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입니다.
사퇴가 의미 있으려면
정몽규 회장의 사퇴 선언은 한국 축구사에 하나의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또 하나의 면피성 해프닝으로 역사에 묻힐지는 아직 모릅니다. 결말을 쓰는 것은 축구협회가 아닙니다. 다음 회장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축구를 사랑하고, 대표팀의 승리에 함께 울고 웃어온 수천만 팬들입니다. 우리가 분노에 그치지 않고, 감시하고 요구하고 참여하는 한, 한국 축구는 반드시 바뀔 수 있습니다. 사퇴는 끝이 아닙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입니다.
YTN digital 김재형 (jhkim03@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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