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전
‘까마귀에 시체가 뜯기고...’ 국군 반란 주동자의 최후 [호준석의 역사전쟁]
2026.05.31 05:09
1925년생으로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한 김지회는 처음부터 북한이 군 반란을 목적으로 남파한 간첩이었습니다. 김지회는 평양학원 대남반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1946년 11월 남하했습니다. 당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의 남로당 프락치 총책은 이병주(1948년 군감사령관 재직 중 숙군)였습니다. 이병주는 김지회의 함흥중학교 선배였습니다. 1947년 1월 김지회는 이병주의 주선으로 육사 3기로 입교합니다. 국방경비대에서 남로당세가 가장 셌던 광주 4연대 작전·정보장교를 거쳐 1948년 6월 4연대 출신이 주축이 된 여수 14연대의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좌익 분자들을 집중적으로 14연대로 끌어들여 이 부대를 좌익의 아성으로 만들었습니다. 1948년 6월 18일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던 박진경 연대장이 남로당계 장병들에게 암살되자 군 내 좌익 색출이 시작됐습니다.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김지회의 구속을 상부에 건의했지만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10월 19일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남로당원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군과 좌익 세력이 여수·순천을 시작으로 호남 대부분을 장악하자 국군은 전방 부대만 남기고 거의 전군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습니다. 14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는 반군을 총지휘해 국군에 맞섰습니다. 언론은 반군을 ‘김지회군’이라 불렀습니다(1948.11.4. 동아일보)
김지회·조경순 부부에게는 5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습니다. 11월 4일 반군은 남원에서 12연대를 격파해 백인기 12연대장이 자결합니다. 대한민국 전복의 위기감마저 감돌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백인엽 부연대장의 지휘로 전열을 가다듬은 12연대는 11월 7일 김지회 부대를 대패시킵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김지회는 반란군 잔당과 구례의 좌익 세력을 끌고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입산해 빨치산이 됐습니다.
빨치산 두목 김지회는 잔인성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을 못 이기고 도망치는 빨치산들을 김지회는 잔인하게 공개 처형했습니다. 총알도 아깝다며 날카로운 칼로 목을 베어 한 명이든 열 명이든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언제나 살기가 서려 있는 김지회의 매서운 눈과 무자비한 잔인성에 빨치산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14연대 사병 출신으로 강제로 반란에 가담했던 서형수씨 증언(2011.7.7. 고창코리아)
1922년생으로 당시 26세, 김지회보다 세 살 많았던 홍순석은 ‘홍창표’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중국 용정 은진중학교를 나온 홍순석은 만주군 중사 출신입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남로당원들의 온상인 육사 3기 동기였고, 광주 4연대, 여수 14연대의 코스도 똑같이 밟았습니다.
14연대 반란 당시 철도 보호 임무로 순천에 파견돼 있던 중대장이었던 그는 부연대장의 반란 진압 명령에 몸이 아프다며 거부하고 순천경찰서 습격을 준비했습니다. 반군을 지휘해 국군과 싸운 홍순석은 입산 후 빨치산 총사령관이 됐고 김지회는 총참모장이 돼서(1949년 1월 4일 자 조선일보) 많은 군경과 양민을 살상했습니다.
1949년 북한의 38선 도발이 잦아지자 국군의 빨치산 토벌부대 일부가 전방으로 이동 배치됩니다. 이를 틈타 김지회, 홍순석은 1949년 3월 21일 빨치산 총병력 500명을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북상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군경에 이동의 흔적이 포착됐습니다. 지리산 북동쪽 거창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3연대 3대대장 한웅진 대위는 그토록 찾던 김지회, 홍순석이 덕유산으로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3월 30일 정일권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이 부대를 진두지휘해 포위망을 좁혔고 4월 4일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 괘관산 전투에서 빨치산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김지회, 홍순석은 다시 지리산으로 숨어듭니다.
4월 8일 3연대 3대대 정보과 선임하사인 김갑순 상사가 지리산 자락인 남원군 산내면 반선리에 찾아갑니다. 주막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로 주며 “이곳이 공비들의 통로이니 공비들이 오면 술도 주고 밥도 주면서 가능하면 재운 다음 대대 본부로 알려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4월 9일. 새벽 2시 반쯤 정말로 김지회, 홍순석 일당 40여 명이 그 주막에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식사 전에 막걸리를 많이 줘서 먹게 한 뒤 약속대로 부엌에 호롱불을 켰습니다. 마을 청년단장이 호롱불을 보고 급히 부대에 알리자 한웅진 대대장과 본부 요원 60여 명이 트럭 2대에 나눠 타고 6㎞ 떨어진 주막으로 출동했습니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자 김지회, 홍순석 일당은 눈치를 채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국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습니다. 달빛이 환한 밤이었습니다. 17명이 사살되고 7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홍순석은 현장에서 사살됐습니다. 농구화를 신고 토끼 가죽 조끼를 입고 있었고 홍순석이라고 한자로 새겨진 도장이 있어 신원이 쉽게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김지회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흘 뒤인 4월 13일 김갑순 일등상사가 반선리에서 5㎞ 떨어진 덕동리 달궁마을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는 김지회의 처 조경순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조경순도 김지회와 헤어져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김 상사는 김지회가 골짜기에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민들에게 “요즘 까마귀 떼가 모여드는 곳이 없느냐?”고 물으니 한 주민이 “연정 마을(지리산 뱀사골 입구) 골짜기에 그런 곳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김지회의 시신은 바로 거기서 발견됐습니다. 주막에서 600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창자가 밖으로 나올 정도로 총상이 심했고 시신은 까마귀들의 밥이 돼 크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등의 흉터로 김지회의 시신임을 판명했지만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하게 하자 그녀는 대번에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반란 5개월 20일 만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제주 조천면 출신으로 목사의 딸인 조경순은 제주도 지리를 잘 알아 4·3사건 주동자 김달삼에게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병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김지회를 알게 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조경순은 빨간 스웨터를 입고 다녀 ‘빨간 스웨터의 공비 여두목’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1949년 9월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동아일보 1949년 9월 30일 자) 북한 김일성 정권은 대한민국에 반란을 일으킨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3급을 수여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반란 당일 거사를 총지휘한 자는 인사계 상사 지창수였습니다. 전남 벌교 출신인 지창수는 초등학교만 마친 뒤 일제 말기 지원병으로 입대했습니다. 북로당의 지령으로 군에 침투한 김지회와 달리 지창수는 전형적인 남로당계였습니다. 그는 박헌영의 전남 지역 심복의 하나이자 동향(벌교) 선배인 김백동의 지시로 1945년 광주 4연대 창설 때 사병 1기로 입대했습니다. 좌파 사병들의 비밀 군사 동맹인 ‘병사 소비에트’ 총책으로 활동하다 일본군 복무 경력 때문에 1등 상사로 진급했습니다. 정치적 배경을 업고 처음부터 간부로 입대할 수 있었지만 바닥부터 조직을 장악하려는 김백동의 계획에 따라 사병으로 입대했던 것입니다.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와 순천을 장악할 때까지 간판스타는 지창수였습니다. 지창수는 “이승만 일당의 경찰이 일본군과 합세해 14연대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북조선 인민군이 지금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비행기로 일본으로 도망갔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으로 북상해야 한다”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14연대 장병들을 선동했습니다.
장교들을 몰살시키고 14연대를 장악한 지창수는 스스로 해방군 총사령관이 되고, 인사과 선임하사 임만평을 부사령관에 앉힌 뒤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을 새로 임명했습니다. 반군이 여수로 진격해 관공서와 시내를 완전히 장악하자 20일 오후 3시 여수 중심가인 중앙동 광장에서 4만 명이 모인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습니다. 반군 지휘관 지창수는 군중들의 환호 속에 등단해 연설했습니다.
“존경하는 여수 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해방군 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우리 인민의 적인 경찰을 쳐부수고 여수 인민을 해방시켰습니다. 우리가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다가 마주치는 그 순간이 바로 조국이 통일되는 순간입니다.(후략)” (김학유 <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사, 1991)
지창수의 유창한 말솜씨에 순박한 시민들은 연설 내용을 그대로 믿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수14연대 반란 (1999.10.17.))
엄청난 참극을 일으킨 지창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일을 저지르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습니다.
“모두들 양순하게 봤지. 남들과 잘 다투지도 않았고... 일도 잘하고, 키도 크고 생김새도 좋고, 성격도 괜찮았어. 당시 뒤에서 조종한 건 김지회나 홍순석 같이 사상에 완전히 물든 사람이고 지창수는 영웅심리도 있고 출세 못한 불만도 있으니 앞에 나서게 된 것 같아.” (당시 14연대 인사장교로 지창수와 인사과에서 함께 근무한 김형운 예비역 대령 증언)
반란 초기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노릇을 한 지창수는 반란이 진압되기 직전인 25일에 여수를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 1948년 11월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가 이현상 부대와 합류해 빨치산이 됐다가 1949년 1월 하동 칠불암 뒷산에서 생포됐다. 지창수의 집안은 광주의 유명한 부호라 재력으로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감옥에서 처형됐다.(안재성 <이현상 평전>, 안도섭 <세월이 가면>)
둘째, 14연대 반란 후 10일 만인 10월말 경 김종갑 소령이 지휘하는 6연대 3대대의 벌교 반란군 소탕 때 죽었다 (이선교 <6.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
셋째, 지리산 입산 후 ‘금싸라기 같은 지하당 간부 동지들을 적지에 내팽개치고 온 행위’에 대해 이현상으로부터 당적 책벌을 받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949년 2월 부상을 입고 국군 토벌대에 생포됐다가 총살당했다.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조금씩 기록이 다르지만 1949년 초 국군에 생포됐고, 6.25 전쟁 초기에 처형됐다는 사실이 대체로 공통됩니다. 대한민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양민을 무고하게 죽인 죄값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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