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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재수생 딸에게 하고 싶은 말

2026.05.30 19:21

13년 터울 늦둥이 임신을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었는데... 너의 감정 워치에 초록 불이 들어오길마흔의 임신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고령 임신과 노산 엄마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2007년 나이 마흔에 둘째를 낳은 노산 1세대로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 빛나던 모자무싸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사람들은 빛났다. 그들의 용기, 끈기, 믿음이었다.
ⓒ JTBC

어렸을 때부터 싸우지 마라, 싸우면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아니, 못 정도가 아니라 귀걸이처럼 대롱대롱 달고 살았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친구랑 싸우지 마세요'를 모닝 챌린지처럼 외쳤다. 싸우는 것은 일단 정지 혹은 후진이라고 배우고 가르쳤다. 그런데 다 크고, 다 늙어서 싸웠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위해 싸우고 있다>(아래 모자무싸)가 방송되는 두 달 동안이나. 누구랑? 나랑.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어요?
아직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으시군요."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12화 마지막회, 변은아(고윤정 분) 내레이션

내 인생이 가장 무가치 하다고 여겼을 때가 언제였나. 소설가의 꿈을 안고 도전했던 신춘문예도 세 번 낙방 후 포기했기에, 나는 20년 동안 일편단심 도전하는 동만이의 무가치함을 모른다. 방송작가 시절에도 적당히 타협하는 눈치 도사가 되었기에, 우직하게 버티는 은아의 무가치함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무가치함과 싸우는 그들은 빛나는데, 나는 자꾸 초라해졌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덮어두었던 마음들을 들추며 나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전쟁은 지난 일요일 마지막 회와 함께 잠시 멈췄다.

<모자무싸> 마지막 회에서 변은아가 던진 질문을 다시 받아들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 물론 있다. 심지어 많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다른 질문 하나가 먼저 떠올랐다. '살면서 가장 좋았던 때' , '가장 행복했던 때'라면 바로 말할 수 있는데. 내 인생 가장 빛났던 순간, 내가 아주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던 그때, 바로 그때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

"태생적으로 자궁이 차요. 임신하기 쉽지 않은 체질입니다."

임신, 결혼은 먼나라 이웃나라였던 갓 스무 살에 받은 선고였다. 생리불순과 수족냉증으로 엄마 손에 이끌려간 한의원에서 의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숙였고 우리는 한의사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설마~' 했지만 한의사는 명의였고, 예언은 적중했다. 나에게 임신은 로또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일이, 나에게는 번호 하나 맞추기도 어려운 확률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임신은 바늘구멍 같은 가능성으로 멀어져 갔다. 하지만 바늘구멍에도 볕이 드는 법, 2년 만에 큰아이를 얻었고, 12년 만에 둘째 임신 로또에 당첨되었다.

'임신'이라는 단어부터 좋았다. 자음과 모음이 격하게 부딪히지 않고, 발음하면 입모양까지 웃상이 되는 느낌이 좋았다. 임금님이 되는 것도 같고, 신이 되는 것도 같았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너무 멀었던 두 글자 '임신'은 막상 한 팀이 되고 짝을 맞추기로 한 뒤부터 세상 친화적 모드로 바뀌었다. 나와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 전국임신자랑 임신은 행복버튼이다. 뭘해도 행복한 순간. 임신 예찬 중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만든 이미지
ⓒ 정현주

일단 입덧의 괴로움이 없었다. 오히려 터지는 입맛으로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평소 두 조각이면 포크를 내려놓던 입 짧은 내가 치킨 두 마리를 먹는 먹방 쇼를 했다. 다이어트에서 공식 해방된 임산부라는 존재감은 그 자체로 '멋진 신세계'였다.

명색이 임산부인데 너무들 걱정을 안 해줘서 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구수한 된장찌개 앞에서 갑자기 구역질을 한다거나, 자장면 한 그릇을 원샷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가슴을 치는 '임신 관심병사'가 되어보기도 했다. 물론 본능적인 식욕 앞에서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D라인도 자랑스러웠다. 마른 체형이었던 나는 임신 초기부터 아랫배가 나오길 기다렸다. 가능하다면 배꼽에 대고 바람이라도 불어 풍선처럼 커지게 하고 싶었다. 허리 라인을 지우며 점점 커지는 배는 내 자존심의 증거였다.

스물다섯 살부터 운전대를 잡은 경력직 오너 드라이버는 임신과 동시에 핸들을 놓았다.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전국임신자랑'을 하기 위해서다. 불룩 나온 배를 내밀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일이 좋았다. 임산부 좌석이나 내 배를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인사를 하는 것도 즐거웠다. 만인에게 인정받는 임산부가 된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든든했다. 뱃속에서 조용히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발로 차며 존재감을 드러낼 때마다 반가웠다. 덩치가 커지면서 배 위로 꿀렁거리며 보여주는 바디랭귀지에는 박수를 치며 대꾸를 해주었다. 혼자 길을 걸어도 함께 걷는 느낌, 곁에 있다고 통통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아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임신이라는 시간을 누구보다 신나게 통과한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빛나는 스토리를 써나갈 아이에게

"선배, 저 임신했어요."
"어머! 너무 축하해. 와. 너무 잘 됐다!"

2년 전 회사 후배의 임신 커밍아웃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나의 흥분 버튼인 '임신 버튼'이 삐— 하고 신호음을 울리자 이야기가 쏟아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당시 마흔 둘이었던 후배는 준비가 안 되었다. 그날도 오전에 산부인과에 고령 임신 검사들을 하고 왔다고 했다.

나는 임신이 얼마나 행복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심지어 남들은 막달이 다가오면 빨리 낳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는데, 나는 임신 열 달에 몇 달쯤 추가 옵션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딸을 39주 4일째 낳았는데 어찌나 아쉬운지. 마흔 노산에도 2시간 만에 자연분만 성공!'

이렇게 나의 임신 드라마는 어느새 웅장한 대하 드라마가 되었고, 후배는 새로운 임신 드라마에 입덕을 시작했다. 자신과 아이가 주인공인, 해피엔딩 드라마를.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런데 요즘 나의 감정워치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액정을 들여다보니 두 글자가 선명하다. '불안'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른다.

재수를 시작하고 딸아이는 조잘대던 말을 잃었다. 조용한 딸아이 방이 궁금해 슬그머니 방문을 밀어보았다가 문틈 사이로 마주친 딸의 눈빛에서 총알이 날아온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며 날이 서고, 오늘은 어땠냐는 질문에는 알아서 하고 있으니 그만 좀 하라는 공격이 돌아온다. 집안 행사에는 단골 불참러가 되었고, 입맛도 변했는지 좋아하던 김치찜 약발도 예전 같지 않다.

고3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눈 뜨면 싫다면서도 가야 할 학교가 있었고, 맨날 붙어 다닌다고 잔소리를 해도 뭉쳐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수생활은 달랐다. 학교처럼 소속된 곳이 없고, 친구들과는 서로의 계절이 어긋난 느낌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를 건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막막한 미래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시간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어요?"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바로 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라고. 그래서일까. 자기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듯 흔들리는 아이를 보면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너는 반드시 너의 빛을 찾아낼 거라고.

'내 인생 최고의 가치'였던 순간의 주인공이 지금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언젠가 우리 딸의 감정워치에도 다시 초록 불이 들어오기를. 자신만의 빛나는 스토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써 내려가기를.

 감정워치에 초록 불이 들어온 장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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