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전
“누나, 진짜 나한테 왜 그래”...황혼의 설렘이 머무는 ‘노년의 성수동’ 제기동
2026.05.30 16:46
밥 먹고 춤추고 사람 만나는 실버 도시
“누나 진짜 나한테 왜 그래.”
지난 17일 오후 7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역 인근 한 콜라텍 앞. 흰 바지에 구두를 차려입은 남성이 여성의 어깨를 붙잡고 울먹였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게 뭐가 되냐.” 여성은 “나는 됐어, 오늘 안 놀 거야”라며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은 제기동역 3번 출구에서 청량리역 방향으로 20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 다른 사람과 춤을 췄느냐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다. 급기야 남성은 “나도 죽겠다”고 외쳤고 여성은 “너 미쳤냐”고 받아쳤다. 20대 연인의 다툼 같았지만 둘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은 승객 두 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역이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경로 무임승차 비율은 47.2%로 서울 지하철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히 노인이 많은 동네가 아니었다. 하루 2만원이면 밥을 먹고, 머리를 자르고, 장을 보고, 춤을 추고,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거대한 ‘실버 도시’가 형성돼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성수동이 있다면 노년층에게는 제기동이 있었다.
지난 17일 오후 5시 찾은 제기동역 3번 출구 앞.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중절모를 쓴 백발의 남성들과 화려한 외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사 안팎에는 홍삼 젤리와 호박엿, 생강 캔디를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었다. 남색 캡모자를 눌러쓴 한 노인은 “친구가 금방 온다”며 콜라텍에 함께 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기동역 인근의 한 콜라텍 앞은 홍대 클럽 앞을 방불케 했다. 반짝이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과 흰 바지에 구두를 신은 남성들이 2~3분 간격으로 건물을 드나들었다. 입구 한쪽에서는 70대 상인이 큼지막한 큐빅이 박힌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흔들며 남성 손님들을 붙잡고 있었다. “이거 하면 여자들이 좋아해.” 가짜 다이아 목걸이는 1만원, 금도금 목걸이는 2만원이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비상계단부터 음악이 쿵쿵 울렸다. ‘부킹 구함’, ‘욕설 금지’, ‘만취자 출입 금지’ 안내문이 붙은 로비를 지나자 거대한 무도장이 나타났다. 입장료는 2000원, 사물함 이용료는 1000원. 오후 4시 30분 이후에는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이 시간에 맞춰 찾아오는 노인도 적지 않다고 했다. 60~80대 남녀가 발 디딜 틈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대형 에어컨 10여 대를 18도에 맞춰 돌리고 있었지만 실내 온도는 22도였다. 반팔 차림의 노인들이 땀을 흘리며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느린 음악이 흐르다 이선희의 ‘J에게’가 흘러나오자 무도장 전체가 들썩였다. 제자리를 돌던 노인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빨라졌다. 여성들은 크게 턴을 돌고 남성들은 보폭을 넓혀 발을 굴렀다. 무도장 벽에는 ’246 금지‘, ‘뽕발 금지’, ‘여기는 잔발 구역’이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발만 잘게 움직이는 ‘잔발’이 이곳의 기본 스텝이다.
춤을 못 추면 파트너가 금세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다. 그래서 제기동과 청량리 일대 사교 댄스 학원은 늘 문전성시다. 월 수강료는 50만원. 서울 동대문구의 한 댄스스포츠 학원 원장은 “평생 일만 하느라 몸이 굳어 ‘통나무’ 소리 듣던 70대 어르신도 몇 달 배우면 콜라텍 카사노바가 된다”며 “손주 돌보느라 자기 시간을 못 가져본 분들이 여기 와서 춤을 배우면서 표정이 달라지고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신복례(80)씨는 이날도 오후 1시부터 다섯 시간 동안 춤을 추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80대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자세가 꼿꼿했다. “여기 와서 춤추고 젊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서울 성동구 뚝섬역 인근에 사는 그는 지하철로 20분가량을 타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제기동을 찾는다. 주민센터와 복지관에서 배운 춤 실력을 이곳에서 마음껏 뽐낸다고 했다. “서예도 익히고 장구도 배웠지만, 나는 춤이 제일 좋아.”
콜라텍 단골 장모(70)씨는 일주일에 여섯 번 이곳을 찾는다. “지하철도 공짜고, 입장료 2000원에 짐 맡기는 데 1000원이에요. 커피 한잔하고 춤추고 사람 만나도 하루 1만원이면 충분해요.” 춤 입문은 1990년대였다. 휴대폰 대리점 장사를 하다 우울증과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해 동네 선후배의 권유로 춤에 발을 디뎠다. “사업 실패했던 기억도 여기 오면 잊힌다”며 “새로운 사람과 춤을 추면 아직도 설렌다”고 했다.
콜라텍 내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슈퍼마켓, 분식집, 1만원짜리 삼겹살 고깃집, 치킨집, 카페 등이 성업 중이었다. 커피 1000원, 쌍화탕 1500원 등 물가도 매우 저렴했다. 술안주와 보양식으로 제격인 미꾸라지 튀김은 5000원, 장어는 1만원에 팔리고 있었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춤을 추고 자연스럽게 밥과 술을 함께 먹는 구조였다.
콜라텍 안에는 남녀를 연결해 주는 부킹 도우미도 있다. 1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한 한 여성은 “서로 모르는 남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이라며 “생각보다 점잖게 춤만 추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헌팅에 성공한 남녀가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재킷에 흰색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은 남성이 초록색 바지와 구두를 깔맞춤한 여성과 손을 잡고 건물을 나섰다. 이들은 양산을 함께 쓰고 유유히 사라졌다. 5~10분에 한 번꼴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커플들이 밖으로 나왔다. 어색한 듯 거리를 두고 걷는 남녀도 있었다. 첫 데이트를 마친 연인들 같았다.
제기동의 또 다른 매력은 저렴한 물가다. 제기동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이어지는 왕산로 북측 700m 구간은 노인을 위한 생활 플랫폼이었다. 저렴한 식당과 이발소, 콜라텍, 전통시장, 병원이 촘촘히 연결돼 있었다. 장을 보러 왔다가 친구를 만나고, 춤을 추고, 진료를 받은 뒤 귀가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노인들에게 제기동은 소비 공간이 아니라 관계와 여가가 이어지는 생활 플랫폼에 가까웠다.
“이거 하나 둘러봐. 인물이 살잖여.” 길모퉁이에서 스카프를 팔던 80대 상인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할아버지를 붙잡아 세웠다. 회색 스카프를 목에 둘러주며 “멋쟁이가 따로 없네”라고 말했다. 노점에서는 “붕어빵 4개 천 원”이라는 녹음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붕어빵을 사면 믹스커피 한 잔은 500원이었다.
인근 다방 메뉴판에는 잔치국수 4000원, 비빔국수 5000원, 쌍화탕 2000원이 적혀 있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상인들이 “삼춘, 고기가 찰져” “누나, 싱싱하니 얼른 가져가”라고 외쳤다. 정육점에는 ‘한돈 1㎏ 3900원’ 팻말이 붙어 있었고 생선가게에는 꽃게와 갈치, 낙지, 오징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최윤순(62)씨는 쉬는 날이면 제기동을 찾는다. 이날 청량리의 한 냉면집에서 8000원을 내고 점심을 해결한 그는 친구와 함께 동묘로 넘어가 작업복을 살 예정이라고 했다. 최씨는 “요즘 냉면 한 그릇에 1만원 넘는 곳도 많은데 여긴 아직 싸다”며 “작업복도 상의 3000원, 바지 8000원 정도면 살 수 있어 자주 온다”고 했다.
경기 의정부에서 온 80대 고모씨는 무료 지하철을 타고 오전 9시 집을 나섰다. 4000원짜리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1000원짜리 붕어빵과 2000원짜리 딸기를 사 먹었다. 500원짜리 믹스커피를 마신 뒤 7000원을 내고 머리를 잘랐다. 해 질 무렵까지 콜라텍과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 총지출은 18500원이었다.
청량리 인근 4000원짜리 칼국수집에서는 낯선 노인 네 명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풍경도 흔했다. 처음 본 사람끼리 김치를 건네고 막걸리를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콜라텍에서 나와 채소 좌판에서 참외 한 소쿠리를 산 민은순(83)씨는 웃으며 말했다. “놀고 장 보고 집에 가는 거지.”
서울약령시장 입구를 지나자 허성순(83)씨가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경동시장에서 장을 본 그는 제기동을 찾는 노인을 두 부류로 나눴다. “쫙 빼입고 구두 신고 온 사람은 춤추러 온 사람이고, 리어카 끌고 온 사람은 장 보러 온 사람이야. 그래도 결국은 다 사람 만나러 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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