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전쟁은 '21세기판 삼국지'…천하통일은 불가능? [커버스토리]
2026.05.30 14:31
◆네덜란드 ASML=천하의 공성병기
삼국지에서 전쟁의 승패는 단순 병력 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공성병기와 병참 체계 역시 중요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에선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공성병기 같은 존재다. EUV 장비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다. 엔비디아의 AI(인공지능) GPU든, 애플의 최신 칩이든, 첨단 미세공정을 구현하려면 EUV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 장비를 전 세계에서 사실상 ASML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건 ASML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광원 기술, 독일의 광학 기술, 일본의 소재 기술이 결합돼야 비로소 EUV 장비 한 대가 완성된다. 즉 ASML은 단순한 네덜란드 기업이 아니라, 서방 첨단 공급망 전체가 집약된 전략 자산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을 EUV 수출 통제로 압박한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첨단 AI 반도체 경쟁에서 EUV는 단순 장비가 아니라 '미래 산업의 성문을 여는 열쇠'로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ASML은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기업들 중 시가총액 1위 기업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 내 중요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다.
◆HBM=AI 시대 병참선 군량미
삼국지에선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군량이 끊기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실제로 관도대전의 승패도 병참 체계 붕괴가 갈랐다.
현재 AI 반도체 경쟁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은 엔비디아 GPU를 AI 시대의 핵심 무기로 본다. 그런데 GPU만으로는 AI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는다.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려면 HBM(고대역폭 메모리)이 반드시 필요하다.
HBM은 GPU 옆에서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공급하는 메모리다. AI 모델 규모가 커질수록 그 중요성도 급격히 커진다. 실제로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함께 HBM 시장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HBM 공급망 핵심 기업으로 떠올랐고, 삼성전자 역시 관련 공격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즉 AI 시대의 핵심 병참선을 한국 기업들이 상당 부분 쥐는 형국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삼국지는 물론 실제 전쟁에서도 군량과 보급선을 장악한 세력이 장기전에 강했던 교훈을 인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AI 시대의 패권은 단순히 누가 더 강한 칩을 설계하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안정적으로 메모리와 패키징, 전력과 생산 능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즉, 오늘날 AI 패권 구도는 단순 기술 경쟁이 아니라, 현대 산업의 병참 네트워크 전쟁이다.
◆반도체 패권은 왜 '천하통일'이 어려울까?
삼국지에서 조조는 천하통일 직전까지 갔던 인물로 묘사된다. 중원을 제패하고 막대한 병력과 자원을 확보했으며, 후한의 허수아비 천자 헌제를 확보해 정치적 정통성까지 손에 넣었다.
그러나 적벽대전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조조는 압도적 강자였지만, 끝내 천하를 장악하지 못했다. 이후 시대는 위·촉·오로 나뉜 천하삼분 구조로 재편됐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때 미국은 세계 반도체 산업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과 국가 주도 투자를 바탕으로 독자 공급망 짜기에 나서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과 대만, 일본과 네덜란드 등의 국가들도 각자 핵심 영역을 쥐고 있다.
즉, 어느 한 나라가 반도체 산업 전체를 완전히 독점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경제 논리와 함께 안보 논리로도 설명된다.
유비의 책사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제갈량은 조조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정면 승부만으로는 천하를 통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장기적으로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 속에서 생존과 확장을 모색하자고 유비를 설득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 역시 단순한 1위 경쟁을 넘어 공급망과 기술, 생산 거점이 서로 얽힌 다극 체제로 가고 있다. 미국이 첨단 설계를 장악해도 TSMC가 필요하고, 엔비디아 GPU가 있어도 한국산 HBM 없이는 AI 성능을 극대화하기 어렵다. 반대로 중국 역시 첨단 장비와 글로벌 공급망 없이는 완전한 자립이 쉽지 않다. 그 외 국가들도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생태계를, 정확히는 전장(戰場)을 구성하고 있다. 기업 뒤에 반드시 정부가 '뒷배'가 돼야 하는 구도 역시 반도체 패권 전쟁의 특징이다.
◆美, 공급망 동맹 집착 이유는?
조조는 관도대전으로 원소를 무너뜨린 뒤 절대 강자가 됐다. 이어 적벽대전에서 큰 충격을 받았으나 세력이 붕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나라의 기반을 다지며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았다.
현재 미국이 비슷하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AI 플랫폼, 운영체제, 첨단 장비 규칙 등 핵심 영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엔비디아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은 세계 AI 생태계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미국 역시 불안 요소를 안고 있다. 첨단 반도체 생산은 대만 TSMC 의존도가 높고, EUV 장비는 네덜란드 ASML, 소재와 부품은 일본 공급망과 연결돼 있다. 희토류 같은 핵심 자원은 경쟁자 중국의 비중이 크다.
즉, 미국은 가장 강한 세력이지만 홀로 성립하는 제국이 아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 전략의 핵심은 단순한 중국 견제를 넘어선다. CHIPS법(칩스법, 미국 반도체 산업 지원법)으로 자국 반도체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엄연히 타국 기업인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 수출까지 조율하려 한다.
좀 더 전방위의 공급망 동맹도 결성한다. 지난해 12월 미국 주도로 출범한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대표 사례다. 평화를 의미하는 라틴어 '팍스'와 반도체 소재인 '실리카'를 합친 조어로, AI·반도체 공급망 협력체다. 핵심 광물부터 AI 인프라, 반도체 등을 공동의 전략자산으로 묶어 국가들을 조직화했다. 출범 당시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네덜란드, 영국, 호주, 아랍에미리트(UAE), 이스라엘 등 8개국이 정식 회원으로 참여했다. 대만을 비롯해 유럽연합(EU), 캐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특별 초청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강해서 굴복시키는 맥락이 아니라, 패권 유지를 위한 관리에 가깝다. 힘으로만 밀어붙여 천하를 차지하려던 수준(적벽대전)에서 병참과 동맹 전체를 관리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한국 반도체 전략 가치 '실적 확인'
이러한 과정은 한국에 위기와 기회 둘 다 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국 투자 확대 압박과 대중국 규제 추세에서 복잡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이 살얼음판이자 가시밭길을 걷는 일일 수 있다. 반면 AI 시대 핵심 병참선이 된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가치 역시 크게 높아지는 등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건 분명 기회다.
삼성전자는 2026년 1분기 매출 133조9천억원, 영업이익 57조2천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는데, 반도체 담당 DS 부문 영업이익만 53조7천억원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AI 수요와 메모리 가격 상승, HBM4·SOCAMM2(차세대 AI 서버용 저전력 D램 모듈) 등 고부가 제품을 성장 동력으로 제시했다.
SK하이닉스 또한 2026년 1분기 매출 52조6천억원, 영업이익 37조6천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엔비디아 공급망과 AI 메모리 수요에 힘입은 결과라는 분석이다.
이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최근 작성됐다. 이 업계 대장이자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가 이달 20일 발표한 2026년 1분기 매출은 816억달러(122조2천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85% 증가했다. 12분기 연속 신기록 경신이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30% 증가한 583억달러(87조6천억원).
다음 분기 매출 전망은 더욱 높아진 910억달러로 제시됐다. 엔비디아의 지속적 매출 증가는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이자 한국 반도체 산업의 먹거리 확대로 볼 수 있다. 젠슨황 엔비디아 CEO는 특히 AI 팩토리 구축 붐을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프라 확장"이라고 표현했다. AI 투자가 꺾이지 않는 한, 그 병참선인 HBM과 서버용 메모리 수요도 쉽게 식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어 최근엔 피지컬AI(physical AI, 로봇·자율주행차·스마트 공간 등 자율 시스템이 실제 물리 세계에서 사물을 인지·이해해 복잡한 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협력이 가시화하며, 이 분야 역시 한국이 주요 병참선이 될 가능성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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