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대신 카드 준 '모자무싸' 엄마, 이 장면 왜 좋았냐면
2026.05.30 11:26
박해영의 작품을 오래 지켜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볼 수 있는, 이른바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기울어지는 세계가 이번에도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 tvN 〈나의 아저씨〉(2018), JTBC 〈나의 해방일지〉(2022)와 마찬가지로, 〈모자무싸〉 역시 사회에서 한 발 밀려난 사람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결국 서로를 살려내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박해영 작가 특유의 구원 서사가 또 한 번 다른 결로 변주된 셈이다.
어딘가 모르게 짠해지고, 상황이나 대사가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해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박해영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이전 작품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꽤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침묵 대신 말을 택한 황동만
| ▲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관련 이미지. |
| ⓒ JTBC |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은 기존의 박해영표 드라마에서 보이던 '멋짐'을 내려놓은 비호감 캐릭터로 출발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 분),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 분)처럼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닮았다.
영화감독이지만 백수라 불리는 황동만은 〈나의 아저씨〉 속 주인공의 동생, 막내 기훈(송새벽 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가볍고 능청스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아직 업계에서 잘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그 자격지심을 가리기 위한 특유의 과장이 겹쳐 있다. 다만 이번에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올라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황동만 캐릭터의 가장 특이한 점은 말이 많다는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나타나 분위기를 깨뜨리는 말을 하거나, 아무도 듣지 않는 독백을 하거나, 단톡방에 수백 개의 메시지를 남긴다. 이전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인 동훈과 구씨가 침묵으로 자신을 지켰다면 황동만은 말로 버틴다. 멈추면 무너질 사람처럼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 8인회의 뒷담화에 이어 단골 모임 장소인 '아지트' 문 앞에는 '황동만 출입금지'가 붙는다. 노골적인 조롱과 배제도 이어진다. "오늘 중요한 손님 오니까 동만이 좀 못 오게 마크해줘"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신기하게도 동만은 움츠러들지 않는다. 분노를 쌓아 두었다가 발차기로, 말싸움으로, 유치한 방식으로 터뜨린다. 심지어 사채업자에게까지 진부한 클리셰는 집어치우라고 일갈한다. 그래서 이전 작품들처럼 쉽게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정 대신 불편함을 먼저 불러일으키는 주인공. 어쩌면 그 점이 이번 작품의 가장 새로운 포인트인지도 모르겠다.
적극적인 여성 변은아
| ▲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관련 이미지. |
| ⓒ JTBC |
반대로 여주인공은 더 적극적이다. <모자무싸>의 변은아(고윤정 분)는 이전 드라마의 지안처럼 몰래 기훈을 돕지도, 미정처럼 조용히 구씨를 챙기지도 않는다. 초반부터 공개적으로 황동만의 편을 든다.
황동만이 화제가 되어 씹히는 자신의 직장 최필름 사무실에서도, 8인회의 공간인 아지트에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고 단호하게 소리친다. 결국 변은아와 황동만의 관계는 일방적인 구원이라기보다 동맹에 더 가까워 보인다.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각자가 잃었던 빛을 찾아 스스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관계.
10년 넘게 거절당한 동만의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를 변은아는 누구보다 꼼꼼하게 읽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될 수 있도록, 제작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메모를 붙여 황동만에게 건넨다. 변은아의 코멘트를 바탕으로 황동만은 시나리오를 수정한다. 수정본은 '잘빠졌다'라는 평을 들으며 결국 제작에 들어가고, 톱배우 섭외에도 성공한다.
변은아가 황동만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작가는 감정워치에 '사랑'이 뜨지 않는 이유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념적인 단어라고, 은아를 통해 말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감정들은 '짜릿', '아찔', 혹은 '흥분'이라는 단어로 표시된다고.
대신 동만은 은아 할머니의 퇴원을 돕고, 동만의 형 진만은 강원도에서 뽑아온 배추를 은아의 집에 배달한다. 동만·진만 형제는 은아의 작품에서 이름도, 존재도 지워버리려 하는 전남친 마재영(김종훈 분)에게 은아가 꿈꾸던 '지랄맞은 오빠'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오랫동안 곁에서 당신을 지켜보며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은아의 마지막 독백은,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관계의 한 장면이 아닐까.
박해영 유니버스에서의 공간과 가족
| ▲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관련 이미지. |
| ⓒ JTBC |
박해영 유니버스에서 반복되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 역시 계속해서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나의 아저씨>의 정희네, <나의 해방일지>의 카페, 그리고 <모자무싸>의 아지트.
각각의 공간은 다른 이름과 다른 형태를 갖고 있지만 하는 일은 닮아 있다. 바깥에서는 버티기 힘든 사람들이 잠시 내려앉아 숨을 고르는 곳이다. 박해영의 세계에는 같은 공간 안에서도 서로 닿지 못한 사람들의 씁쓸함이 있다.
가족의 경우도 보자. 박해영이 그리는 세계에서 가족은 언제나 모순적인 존재다. 지긋지긋해서 도망치고 싶고,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버거운 존재이면서도, 막상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는 결국 떠올리게 되는 곳.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에서 그 세계를 붙잡는 중심은 어머니였다. 집을 지키고, 밥을 차리고, 가족을 이어 주는 사람. 그런데 〈모자무싸〉의 어머니는 다르다.
주인공 동만과 진만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로 그려진다. 대신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변은아의 엄마, 배우 오정희(배종옥 분)다. 이전 작품 속 어머니들이 집과 밥으로 가족을 이어가는 배경처럼 존재했다면, <모자무싸>의 어머니, 오정희는 원가정을 떠나 업계에서의 성취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엄마의 빈자리를 견디며 살아온 변은아 앞에 엄마는 밥 대신 카드를 건넨다. 오정희와 장미란(한선화 분)은 함께 살지만 둘이 집에서 밥을 먹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정희의 양육은 밥을 먹이고 이부자리를 갈아주는 '돌봄'이 아니라, 아이가 맞닥뜨린 문제를 자기 방식으로 처리해 주는 '해결'에 가깝다. 장미란의 사고를 덮고, 변은아의 작품이 전 남자친구 마재영에게 이름 없이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활용한다.
인상적인 건 변은아가 정신과 상담에서 어머니를 지칭해야 하는 순간이다. 버려졌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은아는 '엄마'라는 말을 한 번에 말하지 못한다.
"ㅇ ㅓ ㅁ ㅁ ㅏ(실제 연기할 때는 이응, 어, 미음, 미음 아로 발음). 그 단어는 과장됐어요."
박해영 작가가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넘어, 어머니라는 자리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 밥을 해주고 가족을 묶어 두는 존재에서, 자기 삶을 선택하고 떠날 수 있는 존재로.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뒤 내 머릿속에 남은 한 줄 평은 이렇다.
"박해영 작가의 대국민 셀프-연대 힐링 처방전."
변은아, 황동만, 황진만, 오정희, 장미란 그리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 드라마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으로 기억되기 위해 애쓰는 각자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리고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관계를 향한 노력을 응원하게 됐다.
박해영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쓰는 이야기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녹아 있다고 말했다. 〈모자무싸〉에도 박해영이라는 사람의 조각들이 묻어났을 것이다. 〈모자무싸〉를 보내며 문득 궁금해졌다. 박해영 작가는 다음 작품에서 또 어떤 조각을 꺼내 어떤 세계를 그려낼까. 그리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또 어떤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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