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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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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2026.05.30 00:32

[아무튼, 주말]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 (24)

남극 대륙을 홀로 걷는 모습. 아침에 카메라 배터리에 여유가 있어 멀리까지 삼각대를 옮겨 촬영했다. /김영미 제공

(2024.12.7. / 운행 30일 차. 위도 85도 38분 / 누적 거리 669.59㎞ / 해발고도 1486m / 스틱의 리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부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화이트아웃과 눈이 함께 왔다. 종일 머리를 숙여 나침반에 의지해 걸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나의 첫 산행은 ‘대학 산악부’에 가입하면서 시작되었다. 99학번인 나는 대학 1학년 4계절만 산악부 활동을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 1학년 내내 산악부에서 가장 못 걷는 사람이었다. 한 달에 3번 2박 3일의 정기 산행이 있었고, 쉬는 한 번은 1박 2일의 개별 산행이 있었다. 방학마다 동·하계에 각각 20일 이상씩 설악산에서 장기 훈련을 했다. 훈련의 시작은 대관령부터 설악산까지 일주일을 걸어가는 것부터였다. 20㎏이 넘는 배낭을 메고 한 시간을 걷고 10분을 쉰다. 가장 뒤에 처진 내가 도착해야 모두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배낭이 내려갔다. 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도 함께 마셨다. 늦게 도착한 것도 미안한데, 동기들은 쌀이며 행동식처럼 가장 무거운 덩어리를 내 배낭에서 덜어 갔다. 그렇게 나는 산악부에서 살아남았다. 되돌아보건대 남들보다 강했다면 나는 산악부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썰매를 끄는 며칠 내내 하늘도 땅도 회색이라 우울하다. 그래서인지 산악부 1학년 때 설악산까지 걸어가던 하계 장기 훈련이 생각났다. 구룡령쯤 지났을까? 운행 3일 차 아침 출발 한 시간 만에 나는 걷다가 졸도했다. 온통 앞이 하얗게 흐려지더니 나도 모르게 배낭을 멘 채 쓰러졌다. 두 살 더 많던 대장님 동영 형은 정신 차리라며 상수리나뭇가지를 꺾어 내 뺨에 이슬을 흩뿌렸다. 밤에 텐트에서 운행 일기를 쓰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체력이 약한 게 서럽고 행렬에서 낙오자 같은 기분. 그리고 배낭을 메고 기다리는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힘든 때에 나를 붙잡았던 건 ‘산에 오른 성취감’이 아니라 ‘산악부의 사람들’이었다.

남극과 같은 장거리 훈련은 대학 산악부 시절 1학년 때부터 익혀 온 것들이다. 형들은 히말라야를 올라본 적도, 남극을 횡단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모든 걸 가르쳐 줬을까? 썰매에 식량을 포장해 온 방법도 산악부 시절, 장기 훈련 때 하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학생 때는 3학년을 마칠 때까지 제대로 된 방풍 재킷도 없었다. 이후 장비와 식량만큼은 고급으로 발전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부은 눈이 반밖에 떠지지 않았다. 몰골을 보니 산악부 1년 차 때 아침마다 부어 있던 얼굴이 생각났다. 볼살이 부어 어금니에 씹혔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관절이 부어서 뻣뻣해진 손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지난밤 미리 눈을 녹여 얼지 않게 침낭 안에 넣어둔 물통을 꺼냈다. 아침 시간을 아끼려고, 저녁 식사 후 일기를 쓰며 다음 날 아침에 마실 물을 수통마다 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래도 아침은 늘 쫓기는 기분이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썰매를 끌며 마실 물 2L를 다시 끓인다.

상해버린 돼지고기를 못 먹는 대신 여분 비상식으로 챙겨온 컵라면과 알파미(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동결 건조된 밥)가 있어 다행이다. 상한 돼지고기와 알파미를 분리해서 담아왔기에 밥은 먹을 수 있는 상태다. 식욕은 20대와 같은데 먹을 게 달린다. 다행히 약 5㎏의 여분 비상식으로 챙겨온 치즈와 땅콩버터, 전지분유와 초코 그래놀라를 컵라면과 번갈아 먹었다. 2023년에 먹던 단백질 파우더보다 이런 식품 종류가 포만감도 더 있고 내게 더 맞는 것 같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는데 귀리에 초콜릿이 입혀 있어 분유와 함께 타 먹으면 달달하니 맛도 좋다. 다음에도 이 비상식 레시피는 꼭 챙기고 싶을 정도로 든든하다.

고요한 아침의 정적 사이로 소곤거리듯 텐트 위로 눈이 사뿐하게 ‘사라락~’ 닿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바람이 하나도 없어 눈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나 보다. 피곤함에 절어 기절하듯 쓰러져 자는 동안에도 뇌가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깊이 잠들지 못했다. 요 며칠 사이엔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피곤한 기운에 아침부터 대학 1학년 초짜가 된 기분이다. 뭐 누구나 다 처음이 있지 않은가! 나의 초짜 시절 경험과 기억들이 힘이 되는 아침이다. 가자!

※아시아 최초로 남극 대륙을 단독으로 도보 횡단한 산악인 김영미의 ‘남극, 끝까지 한 걸음’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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