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이야’ 찍고, ‘질풍가도’ 달리고… 유세장 노래엔 특별한 게 있다
2026.05.30 00:31
6·3 지방선거 달구는
선거 로고송의 세계
“찐, 찐, 찐, 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찐이야)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질풍가도)
귀에 꽂히고, 입에 착 붙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노래들이다. 요즘 부쩍 자주 들릴 것이다. ‘찐이야’나 ‘나에게’ 같은 후렴구 가사가 정당과 정치인 이름, 기호로 탈바꿈하겠지만 말이다.
세계를 휩쓴 K팝의 나라, 흥의 민족에겐 선거에도 가무(歌舞)가 빠질 수 없다. 6·3 지방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선거 로고송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잘 만든 노래엔 사람들을 한데 묶고 희망을 품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 선거 현장의 ‘흥 유발자’이자 ‘메시지 각인자’로 제 몫을 해온 선거송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여전한 트로트 천하, 록의 진격
잘 팔리는 선거 로고송엔 공통점이 있다. 밝고 흥겨운 댄스풍 멜로디, 쉽고 명료한 가사, 중독성 있는 반복 후렴구 등이다. 후렴구나 제목이 후보 이름으로 바꾸기 좋은 ‘세 글자’라면 금상첨화다. 이걸 다 갖춘 선거송의 절대 강자는 바로 댄스 트로트. 이번에도 법칙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로고송 20곡 중 9곡, 국민의힘 12곡 중 6곡이 트로트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대중가요로 로고송 사용 승인을 받아간 건수는 약 4000건으로 집계된다. 특히 톱10 중 7곡, 톱 5 중에선 4곡이 댄스 트로트다.
1위는 ‘찐이야’(15%)다. 가수 영탁이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 결승전의 작곡가 미션에서 선보인 메가 히트곡으로, 발표 직후부터 선거에서도 인기가 치솟았다.
‘찐이야’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모두 공식 로고송으로 선정한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한 선거구에서 양당 후보가 모두 ‘찐이야’를 부르는 풍경도 펼쳐진다고 한다. 그만큼 정치 성향을 떠나 남녀노소 좋아하고, 기호와 이름을 각인시키기 쉬우며, 현장 분위기를 잘 띄우는 노래로 검증됐다는 뜻이다.
특히 민주당은 작년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승리를 이끈 로고송 위주로 지방선거 플레이 리스트를 짰는데, 2022년과 2025년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선점했던 ‘찐이야’를 새로 편입시켰다. 정치권에선 “‘찐이야’가 민주당의 중도·보수 표심 공략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선거 로고송의 황태자로 불려온 박군의 ‘한잔해’와 박상철의 ‘무조건’은 각각 3위, 5위를 차지했다. 이 노래들의 효력은 여전히 막강하다는 평가다.
특히 지난 20여 년간 선거송 승인 누적 건수 1위를 기록한 ‘무조건’은 피로감을 우려해 양당이 공식 로고송에선 제외했지만, 후보들은 정당을 막론하고 “이만한 곡도 없다”며 받아간다고 한다. 민주당의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는 ‘무조건’이 자신의 애창곡이라며 직접 포함했다.
톱5 중 유일하게 트로트가 아닌 록·메탈 계열이 있다. 사용 승인 건수 2위를 차지한 유정석의 ‘질풍가도’(12%)다. 민주당의 ‘대선 승계곡’ 1순위 곡이자 민주당원 선호곡으로 꼽힌다. 고음으로 휘몰아치는 고양감, 열정적인 가사 덕에 스포츠 경기 응원가나 군부대 위문 공연, 대학 축제 때 ‘떼창’을 많이 하는 노래다.
‘아파트’ 역주행, ‘오빠’의 퇴조
‘질풍가도’는 서사가 꽤 깊다. 2004년 일본 애니메이션 ‘쾌걸 근육맨 2세’의 한국판 오프닝 곡으로 투니버스가 자체 제작한 곡이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Z세대에겐 ‘운동회 노래’로 기억될 정도로 친숙하다. Z세대가 투표권을 얻기 시작한 2017년 대선부터 정의당·진보당이 틀었고, 2022년 대선에선 대학가 등에서 이재명·윤석열·심상정 세 후보가 다 불렀다.
그런데 2024년 연말부터 탄핵 찬성 집회의 배경 음악으로 울려 퍼지더니, 이듬해 민주당의 대선 유세장으로 이어졌다. 국민의 힘은 틀지 못했다. 어쩌다 진보 진영의 주제곡, 보수의 금기곡처럼 됐다.
4위인 윤수일의 ‘아파트’는 1982년생 최고령 곡이다. 음악저작권협회는 “6·3 지방선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는 ‘아파트’의 급부상”이라며 “지난 20년간 이 노래의 선거송 승인 건수는 단 28건이었는데 올해 갑자기 신청이 수백 건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정당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 이유가 좀 엉뚱하다. 2024년 말 발표된 블랙핑크 로제의 글로벌 히트곡 ‘아파트’의 대안으로 누리는 반사 이익이라는 것이다. 지난 대선부터 여야가 로제의 ‘아파트’를 쓰려고 백방으로 뛰었는데, 로제는 “브루노 마스 등 외국 공동 제작자들과 협의가 어렵다”며 선거송 승인 창구인 음악저작권협회도 탈퇴했다. 국내 정치에 이용되기 싫다는 뜻이다. 앞서 싸이도 ‘강남 스타일’의 선거송 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윤수일 역주행은 로제 덕에 외국에서도 한국식 발음으로 알게 된 ‘아파트’가 한국의 주요 정책 키워드가 된 현실을 반영한다. ‘아파트’는 도심 유권자의 최대 관심사인 아파트값과 부동산 정책을 잘 풀어보겠다는 후보들 메시지를 담아 활발하게 개사되고 있다.
한편 6·3 선거에선 한국 남성들이 좋아하는 호칭인 ‘오빠’를 듣기 어렵게 됐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부산 북갑 하정우 국회의원 후보가 초등 여학생에게 “오빠라고 해봐”라고 한 일의 여파다. 이후 민주당이 발표한 로고송에 붐의 ‘옆집 오빠’가 포함되자 다시 논란이 일었다. 현재 부산은 물론 각지의 유세 현장에서 이 노래는 사실상 금지곡이 됐다.
승인된 주요 로고송 중 ‘오빠’가 붙은 노래는 일제히 사라지다시피 했다. 역대 선거에서 후보들이 불렀다 하면 당선됐다던 박현빈의 ‘오빠만 믿어’도 덩달아 밀려났다.
강원도지사 우상호 후보가 윤수현의 ‘오빠가 1번’을, 김진태 후보가 ‘오빠만 믿어’를 각각 로고송으로 채택했지만 ‘오빠’ 부분을 다른 말로 바꿨다. 한 프로덕션 관계자는 “유명한 노래는 아무리 개사를 해도 원곡의 핵심 가사가 뇌리에 남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 조용해져도… 흥은 계속된다
선거 로고송 시대가 개막한 건 1997년 대선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DOC와 춤을’을 ‘DJ와 춤을’로 개사해 직접 춤을 추면서다. 2000년 총선에선 시민단체 낙선 운동 여파로 이정현의 ‘바꿔’가 휩쓸었고, 2004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이 드라마 대장금 주제곡 ‘오나라’를 ‘한나라’로 바꿔 탄핵 정국을 극복했다.
2010년대 K팝과 댄스 트로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중독적인 후크송과 집단 안무가 선거의 필수 요소가 됐다. 선거 로고송 수요가 급증하자 인기곡 ‘저작인격권료(창작물 변형의 대가로 원곡자에게 보상금 조로 지급하는 돈)’만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기도 했다. 이때 많은 트로트곡 제목이 세 글자로 지어진 것도 선거철 수요와 관련 있었다.
다만, 최근 선거 로고송 수요는 주춤하는 추세다.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결정타였다. 침울한 분위기에 유세송을 자제하거나, 위로를 전하는 조용한 발라드를 틀기도 했다. 선거 관련 민원 중 ‘소음’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공공장소에서 음악 트는 게 민폐처럼 여겨지는 영향도 있다.
무엇보다 불황이 길어지고 정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특정 정당의 유세를 현장에서 보고 즐기는 유권자가 크게 줄었다. 이번 선거는 현장의 세(勢) 과시보다는 SNS와 숏폼 등 짧은 온라인 메시지 경쟁으로 옮겨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수도권과 아파트 단지에선 로고송 비중이 크게 줄었다”면서도 “여전히 지하철역과 시장처럼 사람 모이는 곳에선 신나는 로고송이 큰 역할을 한다. 현장의 기세가 올라야 온라인도 불이 붙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남에서 뛰는 야권 후보 측도 “처음엔 숏폼으로만 승부하려다 뒤늦게 부랴부랴 트로트와 응원곡을 투입했다”고 했다. 세월이 변해도 선거는 이성으론 설명할 수 없는 감성, 흥으로 움직이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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